[묵상글]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전봉석 2021. 1. 1. 06:09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태복음 2:6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더는 어디로 가야 할지, 이정표를 잃듯 동방에서 오는 박사들이 좇아가던 별을 잃었을 때, 그 파국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들은 상식에 의존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당연히 헤롯 왕궁으로 갔다.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려 헤롯과 그 일당은 거짓으로 저들을 환대하고, 실상을 쫓다 끔찍하고 엄청난 살인을 자행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 이 또한 모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빛이 있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 빛을 잃으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그와 같은 일은 우리 곁에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0-13).”

 

이 빛은 곧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우리는 감출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동방박사들의 예물과 같이 드려진다. 저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2:11).” 황금은 영원한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을 의미한다. 유향은 기쁨과 즐거움을 뜻한다. 몰약은 쓴맛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패를 방지한다. 이는 차례대로 성부와 성령,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묵상하게 한다. 훗날에 니고데모는 죽으신 예수의 시신에 바르려고 몰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한 해가 저물고 새해 아침을 맞았다. 어느 해보다 유난스러웠던 지난 한 해를 보내면서도 나는 덤덤하였다. 몇몇의 아이들이 새해 인사를 전하는 카톡을 남겼다. 누구는 벌써 결혼을 하여 아이아빠가 되었고, 누구는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봐도 짐작이 가지 않는 얼굴로 변해있었다. 나는 뭐라 답을 해야 할까 잠깐 생각하다 밀어두었다. 지나간 모든 것은 유난하기 마련이고, 오늘에 이르러는 그리움이 아련함으로 더러는 애틋하고 더러운 느낌이 없으며 더러는 새롭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이 충만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는 것으로써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 충만이다(14). 그러니까 나는 새벽에 앉아 잠깐 새해 인사로 받은 <지나간 아이들>의 카톡을 보고, 저들의 프로필 사진을 보다,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저편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씀이 새롭다. 그러다 마주하게 되는 빛, 아니 그 충만함에 대하여…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고, 베푸셨던 ‘은혜 위에 은혜’를 묵상하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따라온 동방박사들의 예물이 상징하는 것과 같이 모든 상황 속에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충만하심을 깨닫는다.

 

이 충만은 생명이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4).” 부활의 주, 성령의 향기인 유향으로 나를 두르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때도 나와 함께 계셨다. 아이들이 어떻게 그리도 좋아라, 하고 따랐을까?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은 종종 ‘하현교’라 부르며 ‘무한진리교’라 놀려댈 정도로 따랐다. 심지어 미술을 전공하기로 하고 집에서는 글방을 그만두라 하는데도 아이가 좋다고 계속 오는 터에 아이엄마는 더 이상 아이를 받아주지 마시라, 교육비는 내지 않겠다, 하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말은 그게 나의 재능이었겠나? 열 평 남짓한 보잘것없는 공간에서 더욱이 볼품도 없는 일개 학원 선생일 뿐인데, 아이들은 어떤 것에 이끌려 글방을 좋아했을까? 한 아이의 인사말에서 그때를 회상하다 나는 사뭇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살면서 과분하게 넘치는 충만, 빛, 그 사랑으로 살았던 것을 새삼 감사하게 된다. 주가 친히 나를 잘 아심이라!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확신하면서부터 돌아본 나의 모든 지난날들이 어느 순간도 저가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신 적이 없었다.

 

많은 이들은 기적을 구하고 어떤 표적을 바라며 살고 나 역시 그러했을 과거에, 하나님은 나의 생이 표적이 되게 하셨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그렇듯 구할 때는 미처 깨달을 수 없었더니, 문득 새해 아침 말씀 묵상을 하려고 앉아 간밤에 들어온 카톡 몇 개에서 나는 이를 깨달았다. 돌아보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생이었으나 주께서 그 값을 너무 후하게 쳐주시는 느낌이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어제도 설교원고를 작성하며 미처 몰랐던 말씀의 의미가 이 새벽에 다시금 울려 펴지는 것 같다. 나의 날들이 모든 순간마다 주는 살아계셨고 역사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듯 되새기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도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수업을 다 할 수 없었다. 그러니 팀을 정하고, 순서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엄마는 그만 오게 하려는데 아이가 좋다고 오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었고, 같이들 구석방에 쭈그리고 앉아 조금 전에 같이 읽으며 첨언했던 원고를 깔고 라면을 진탕 끓여먹었던 기억도 난다. 심지어 시간이 밀려 새벽 한두 시에 끝나는 팀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잘난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은혜 위에 은혜>였다는 것, 이 새벽에 나는 뜬금없이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다 감격하게 된다. 그땐 정말 그랬었지? 하는 심정으로.

 

이처럼 새벽은 늘 어제와 내일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다산 정약용은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었다. 마당을 쓰는 일이 저에게는 기도였고 묵상이었다. 그리고 작은 방에 들어가 글을 쓰거나 서책을 보았다. 나의 새벽은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에도 어김이 없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온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 바치는 것을 묵상하다, 전날 자정쯤에 들어와 있는 아주 오래 된 아이들의 카톡을 훑어보다, 목사가 되고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삽시간에 아이들이 빠져나갈 때의 그 아찔함에 대해서도, 이제는 그저 긴 여운이 따라 남을 뿐이다. 어느 순간도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지 않은 적이 없다. 심지어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그 외로움으로 죽음을 결심하고 자살을 꿈꾸며 다니던 시절에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나를 비추고 계셨다. 지난해만 해도 난데없는 코로나19 사태로 나날이 급박하였고, 그 와중에 11년간의 필리핀 생활을 마치고 아들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며 종일 같이 교회에서의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다들 장성하여 자식들도 이제 어려워져 때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애달파하면, 아내는 그러는 나를 핀잔하다 저도 다를 바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할 때 이제는 잠잠히 주를 바라는 시간이 충만하여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돌아보면 순간이었고 내다보면 까마득한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늘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할 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나의 지나간 모든 날들은 해악하나 그러한 시간들로도 하나님은 주의 선하심을 증거하고 증명하시는 것이다. 그때는 심지어 내가 내 영혼을 해하려 하듯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리하며 살던 때이다. 어찌 이를 바꾸어 선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시 103:16-17).” 이제는 그때의 아이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장성한 저의 얼굴과 이름이 연결되지 않아서 한참을 들여다보다 답을 보내지 못하고 있을 정도인데,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이제나 그때나 여전히 또렷하여서, 정작 저들이 잃어버린 별 빛은 한 번도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순간 상식에 기대고 자신의 판단을 따를 때 우리의 우여곡절은 난데없고 가열차다. 그렇듯 우리 인생은 허무할 뿐이어서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78:39).”

 

나의 이 가련함을 주님이 아심으로, 아시면서도 어찌 그처럼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 ‘은혜 위에 은혜’라는 표현과 ‘충만하심’이란 표현 앞에서 나는 아찔하다. 어느 때보다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새해 첫 새벽에서의 묵상이라니! 이로써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하는 것처럼, 앞서도 말한 설교원고를 작성할 때와는 다른, 어떤 벅찬 감격이 나를 에우시며 이 새벽을 감도는 것 같다. 내가 더 무얼 바랄까? 오직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요 10:28).” 그 일, 나의 생에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는 이제 안다. ‘은혜 위에 은혜’라 하면 나는 내 죄 값으로 이미 죽어 마땅한 시절이었으나 그때에도 주의 은총으로 나를 보살피시는 주의 사랑이었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이었다.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주의 음성이 이제야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아,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 나로서는 한 뼘도 안 되는 기억을 가지고도 이처럼 감격해하는데 하물며 영구함으로 장구하신 주의 긍휼하심으로는 어떠한가? 그저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어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18).” 찬송할 따름이다. 나의 날들은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으로,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