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전봉석 2020. 12. 30. 05:5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4

 

 

주께서 우리의 힘이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오늘을 사는 데 있어 근심은 필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믿는 자의 근심은 가치가 있다. 그것으로 주를 찾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를 더욱 의지한다. 이는 오늘 말라기서 마지막 장이 전하여 주는 힘이기도 하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실제 이 나이쯤 되니 어디가 아프거나 누가 고통당하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치료의 광선을 비추시며 외양간의 송아지 같이 뛰놀게 하신다. 이를 그대로 시편의 말씀으로 받으면,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누구의 사연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려운 일이 연타로 날아들지만 그래서 더욱 기도하게 된다는 말에 내가 오히려 위로를 얻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살면서 누구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을 수는 없고, 우리 육신의 낡아짐을 피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어제는 시편 39편의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 초안을 작성하다 알겠다. 다윗이 노년에 병들어 괴로움 중에 시를 쓴다.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돌아보면 인생은 허망할 따름이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0-11).” 이를 앎으로 주께 더욱 의뢰하고 주를 바라는 사람들이 구별된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3).” 누구나 나이 들어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를 대비하며 마음을 다하는 일이 우리 믿는 자에게 더하시는 지혜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 한다. 아닌 자들은 새로워질 속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심은 근심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세상이 주는 근심은 그저 사망을 더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는 살리고 다른 하나는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나는 이 말씀을 오래 붙들고 앉아 묵상하였다. 곧 우리 안의 근심이 헛되지 않을 것은 첫째, 우리로 간절하게 한다. 이는 미처 주를 바라고 의지하지 못하던 마음을 돌이키게 한다. 그동안 안이하고 무기력했던 자신을 곧추세워 간절히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을 바라게 한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둘째, 우리 안에 두시는 근심은 우리들로 하여금 변증하게 한다. 전에는 그저 ‘나른한 오후 같던 신앙’을 다잡아 우선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나아가 생활 가운데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게 한다. 종교와 신앙은 엄연히 다르다. 종교는 자기 확신으로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열심으로 더한다. 그러니 자긍심이 크다. 스스로를 자부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이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붙든 게 아니라 복음에 붙들린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하는 고백이 나온다. 곧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그러므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엄연하여, 우리는 ‘나를 잡고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십자가의 용사들이다.’ 더욱 명징한 사실은 종교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신앙은 선택된 것이다. 이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셋째, 우리 안에 두시는 근심은 우리로 분하게 한다. 전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여기던 죄악에 대하여 돌아보며 분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살았던 나의 삶이 분하다. 아무 생각도 의지도 없이 산 것 같아서 분하다. 여전히 다를 게 없고 번번이 넘어지기 일쑤인 내 자신의 허물과 실수로 인해 분하다. 나의 어리석음이 분하다. 더욱 주를 사모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상의 온갖 근심이 덩달아서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이 분하다. 이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하시며 주님은 우리를 위로 하신다.

 

넷째, 주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로 두렵게 한다.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특혜다. 정작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자이기 때문이고, 자신을 절규하듯 주 앞에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 선한 의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이처럼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지혜의 역동성이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날을 사는 데 있어 얼마나 소중한지,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더하신 ‘거룩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앎으로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하여지기를 사모하게 한다. 즉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시 89:7).”

 

디섯째, 우리 안의 두려움은 우리로 더욱 주를 사모하게 한다. 주를 사모함으로 자신이 추구하려는 삶의 방향을 돌이킨다. 그에 따른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그 안에 서린 죄악 된 마음을 직면하기도 한다. 마냥 선한 의지로 주를 바라고 의지하지는 않는다. 속된 말로 꿍꿍이가 더 있어서 스스로 의롭게 여기거나 만족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이만큼 기도했고, 저만큼 말씀을 보았으니… 하는 당위적인 논리로 주께 청구서를 내밀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두시는 근심은 우리로 더욱 주를 사모하게 하는데,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더 큰 은사’ 곧 성령이 늘 주도하시는 삶. 나를 이끌어 주의 길 가게 하시는 힘.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과감히 내려놓게 하신다. 고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러므로 너무 과한 열심도 노력도 해가 될 수 있다. 충성에 절제가 더하지 않으면 맹목적인 희생이 되고 이는 보상을 바라며 후회하게 된다.

 

여섯째, 우리 안의 근심은 열심 있게 한다. 이 열심은 세상으로의 추구와 가치를 따라 성공하고자 하는 열심이 아니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말씀 묵상과 기도’에 열심을 갖게 하고, 이것이 주는 참된 평안과 즐거움을 알게 한다. 이는 그 어떤 노력보다 귀하고, 나름의 성공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는 바울의 은유적인 표현은 남을 이롭게 하되 저로 더욱 주의 사람이 되게 하려 함이다(고후 11:2).

 

일곱째, 우리 안에 두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근심은 스스로를 근신하게 하며 벌하게 한다. 전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말던 습관과 태도를 경멸하게 한다. 스스로를 관대하게 여기던 자세를 혐오하게 한다. 세상의 이치는 남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 안의 근심은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한다. 그래서 나이 들어 나름은 누그러들었을 줄 알았던 자신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여기서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실까 두렵다는 불신앙적인 의미가 아니다. 곧 자신이 증거하고 묵상하고 간직하였던 말씀에서 이탈할까, 스스로를 근신하며 하는 소리다. 나도 실은 가장 나를 어렵게 하는 것이 깨달아 알고, 알게 된 것을 전하고는 그와 같이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연약함이다. 행여 병들어서 고통 중에 있을 때 내 안에 원망과 서러움이 나를 휘어잡을까 하여 두렵다. 말씀은 입으로 전하고 머리로 아는 데 그치지나 않을까 하는.

 

그러할 때 오늘 말라기서의 말씀은 나로 소망을 갖게 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4:2).” 나로 주를 경외함으로 남은 생을 다하게 하시기를. 돌이켜 지난날을 통회하고 참회하는 만큼 ‘주를 찾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이와 같은 간구가 내 안에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게 하시기를. 그런 거 보면 신앙이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 맞다. 어제는 문득 생각하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로 찬송을 하게 하시지만 나아가 찬송이 되게 하신다. 전에 누구의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저이에게 이와 같은 차원이 다른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곧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이는 믿는 자로 살며 신앙을 지키는 기본인데 그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어느 것도 예외일 수 없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이는 우리로 찬송을 하게 하려 하심이고, 나아가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나는 오늘 시인의 간곡함으로 주를 부른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이나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것으로 같은 근심을 해도 우리는 주의 도우심으로 간절하여 자신을 벌한다. 그리하여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나 모든 게 주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한 것이어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