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15:11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시편 85:9
말이 곧 인격이고 습관은 평소의 사소함으로 굳어진다. 말을 해놓고, 뒤늦게 주워 담을 수 없어 민망할 때가 많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 속에 있던 것들이다. 특히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의 특징은 이를 별식처럼 즐긴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래서 나는 요즘 ‘일인 방송’들을 좋게 여기지 않고, 특히 남의 말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자신을 두고 할 말인데 남의 말로 대신하는 것이어서 보면 유난히 싫어하게 되는 사람의 경우 저의 미운 게 내 안의 것과 닮아서이다. 나의 뱃속에 온갖 배알이 쌓여 악취를 풍기다 트림처럼 큭, 하고 올라온다. 그러한 내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는 이의 약속을 되새기게 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는 시늉으로 그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산다는 증거는 평소에 쓰는 말로 증명된다.
말을 해놓고 두려운 까닭은 그만한가? 자신할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늘 우리 믿는 자들의 속에서는 동시에 긍휼을 바라는 말이 나온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정작 예수께서 가장 혐오하셨던 것은 우리의 종교심이다. 저는 스스로 자부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그리고 스스로 견주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2).” 자부하는 것이다. 종교인의 특징은 전도서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게’ 열심이면 영락없다.
이는 그야말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일이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이러한 말씀 앞에서 나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어 두렵다. 나의 두려움이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도 하나 상대적으로 나와 같은 자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말로 덮어버리려고도 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란 ‘말조심’ 하는 데서부터 시작인 것 같은데, 번번이 부정적인 말을 하고는 후회한다.
당신을 탄식하게 한 죄,
내 가슴에서 몰아낸 죄를 미워하나이다
-윌리엄 쿠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러한 자신으로 근신하는 것이다. 별 수 없다. 서로 간에 떨어뜨려 마음이 동요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유난히 개인 유듀브가 활성화되고 저들의 말에 놀아나듯 그 말을 여과 없이 다른 이에게 말하는 ‘가짜뉴스’가 문제다. 그러니 별 수 있겠나?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2).” 누구는 ‘코로나19’로 호황을 누리듯 정부를 비난하며 돈벌이를 한다. 누구는 온갖 감언이설로 더욱 자극적인 표현을 구사하고, 구독자를 끌어 모으려 변태 짓도 서슴지 않는다. 특히 ‘먹방’을 찍는 이들이나 이를 보며 응원하는 이들이나. 진영논리에 따라 상대진영을 비아냥거리며 저잣거리 투전판의 말장난처럼 낄낄거리는 무리들을 나는 혐오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 말종을 보는 것 같다. 무력하게 이 말을 시청하며 돈을 보태거나 말을 더해 옮기는 ‘노인들의 새로운 문화’를 나는 경계한다. 교회 안에서도 다들 머리가 크고 입이 자라서, 설교를 훈시하고 목사를 비트는 말들로 그 근거는 유튜브에서 본 것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아,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3).” 근신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저런 사람들의 특징은 누가 뭐라 하면 모두 적으로 돌린다. 동조하지 않으면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호 6:5).” 할 말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늘 간구한다. 누구와 통화할 때도, 어떤 일에 욱, 하고 감정이 먼저 일어날 때도 부디 말이 앞서지 않게 해주시기를. 이를 분간할 줄 알게 하시기를.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욥 12:11).” 어째서 이 일이 어려운가 하면 내 속에 기름이 끼어서 그렇다. 스스로 족한 줄 알면 남에게 단호한 법이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시 17:10).” 나는 그래서 일부러라도 유튜브를 보지 않는다. 말이란 게 본래 보면 더해지고 더해져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속성이 있다. 웃자고 한 말인데 돌고 돌아서 내 귀에까지 올 때면 죽자고 덤비는 게 되었다.
이는 모두 재앙의 날에 나타나는 증거다. 시편 41편을 살펴, 설교원고 초안을 준비하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빈약하다. 이를 알면 알수록 주를 경외하게 된다. 그럴 때 가난한 자를 보살피게도 된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1).” 이는 주께서 새로이 주신 계명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런 상대를 두고 낄낄거리며 저들의 폐부를 드러내고 비난하여 시빗거리로 삼아 밥벌이를 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니. 성경은 엄연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곧 자신보다 못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한 뼘 길이도 안 되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말들로 채워가는 삶이야말로 덧없다. 시인은 이어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시 41:2-3).” 결국 서로를 응원하고 이끌어야 하는 이유겠다. 우리가 이생의 종말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섬뜩하고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회개다. 자신을 돌아보아 주께 아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4).” 누구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다 불쑥, 내가 다르지 않고 더하다는 것에서 좌절한다. 이를 깨달을 때면 말씀 앞에 덥썩 엎드린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 몹쓸 말과 나의 뱃속의 악취를 어쩔 것인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다른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닌 척 괜찮은 척 하다 거짓말은 더욱 부풀려지고, 공연히 남을 겨누는 말로 둔갑하며 시빗거리를 만든다. 또한 누군가 나를 향해서도 그럴 수 있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시 41:5).” 그런 말들, 요즘은 ‘악플’이 다반사라 뒤틀린 속내를 말로 푸는 족속들이 태반이다. 뭘 해도 저들의 말은 삐딱하다. 어떤 사안을 두고도 외눈박이 같다. 사시들처럼 곁눈질로 바쁜 이들이다. 시선은 한쪽으로 쏠리고 말은 여과없이 분출된다.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치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우리가 결코 예외라고 말하지 않는다. 근신하고 깨어 있어라. 다른 길 없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시 41:6).” 그 중심에 악을 쌓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7).” 수군거리며 패거리를 형성하고,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8).” 남에 대해 단언한다. 암울한 시대에 뉴스를 보는 일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다. 양부모가 아이를 학대하다 죽게 하고, 이를 분개하며 사람들이 공분하고, 보궐선거를 앞두고 그야말로 썩은 말들이 풍년이다. 그러니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9).”
우리는 다만 주를 바라고 의뢰할 뿐, 사람은 결코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굳이 배신을 당해보지 않아도 사람 사는 이치가 그런 것이어서 좋을 때는 좋으나, 다들 제 살 궁리에 바쁘다. 그러므로 내게 도움을 준다하여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3-4).” 인생은 본래 의지할 게 못 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그러므로 우리의 반격은 주의 사랑밖에 없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시 41:10).” 되레 나를 공격하는 이를 두고 기도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말도 안 되는 말이 기도로 나온다.
결코 우리의 원수가 우리로 기뻐할 수 없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시 41:11).” 그 이유는 주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저가 나를 세우신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한다. 그리하여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그렇게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45:1-2).” 오늘 시편의 말씀도 그런 맥락으로 읽는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85:10-11).” 그것이 나의 입의 말로 나타나서 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12).” 주가 이루실 것이다. 그리하여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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