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1. 1. 12. 06:14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3:6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새로움은 두려움과 같이 온다. 앞날은 불안을 머금고 내일은 염려와 근심을 담보로 한다. 왜 우리는 무슨 일에 앞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데는 별 수 없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로를 통해 이를 뒷받침할 수 있겠다. 저들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다.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민 13:26).” 애굽에서 나와 몇 주간의 시간이 흘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두고 있었다. 뜬금없이 저들은 정탐꾼을 보내어 새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을 알아오게 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리하게 하신 일 같으나 실은 저들이 요구한 것이다. 본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신 1:22).” 백성들은 아우성이었고 모세는 이를 하나님께 고하며 기도하였고, 그와 같은 기도응답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가령 저들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보다 남들처럼 사람을 왕으로 세워 통치하고 다스리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사무엘은 통탄해하고 이로 인하여 생겨날 비탄해질 삶을 알렸으나 저들은 끝내 왕을 원했고, 하나님은 그리하게 하셨다. 결국 저들의 왕들은 저들로 부역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고 그릇된 길로 가게 하여 멸망으로 인도하는 역사를 본다. 문득 히스기야의 기도 역시, 죽을병에 걸려 자신이 의로웠던 날들을 근거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고 저의 생명은 연장되었으나 이내 그 시기에 낳은 아들 므낫세가 훗날에 왕이 되어 저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왕이 되었다. 그렇듯 우리가 무엇을 바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따라 구하고 아뢰고, 조용히 주의 인도하심으로 더하는 순종보다 귀한 것은 없겠다. 이스라엘은 결국 열 명의 정탐꾼을 세워 저들로 약속의 땅을 미리 알아보고 오게 하였다. 나름은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며 훨씬 지혜로운 처사 같다. 하지만 엄연한 거역이고 불신앙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으로 그리 믿고 준행하였으면 될 것을 저들은 좀 더 새로운 정보와 확신을 얻기를 원했고 급기에 십대이의 말도 안 되는 표차로 부정적인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마치 하나님의 선물을 뜯어보고 받든지 말든지 결정하자는 꼴이었다.

 

그렇듯 우리의 불신앙은 염려와 근심을 적당히 감추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원한다. 누가 믿음으로 주만 바라겠나? 여기 말도 들어보고 저기의 의견도 들어보고 그래서 종합하여 다들 괜찮다 하면 좋은 것이고, 열 명이 부정적인데 여호수아아 갈렙 두 사람만 극구 하나님의 뜻대로 하자고 주장한들 먹힐 리 없었다. 우리의 앞날은 모두 미지이다. 육십 세를 맞으며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이는 무엇을 할 지 요즘 궁리가 많다. 내일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문제들이 앞서서 걸려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다 확실한 정보를 바라고,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말이지 넘쳐나는 정보를 가지고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어 ‘남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리로 선택한다. 행하는 길로 불안을 억누르는 방법으로 다수의 의견을 따른다.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나 그의 뜻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선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믿음으로만이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오늘 말씀에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6).” 하시니 무엇을 보고 무엇으로 들을 것인가?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더욱이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우리는 전대미문의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내남없이 우리 안에는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감이 자리 잡았다. 불안은 정보를 취합하여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전까지 우리 목을 옥죄는 듯하다. 어느 때보다 상담업체가 성업을 이룬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아파트값에 투자자들이 몰리고, 대학입시를 앞두고 이를 컨설팅해주는 학원이 떼돈을 번다. 새로 만들어진 백신에 대해 보다 확실한 정보를 구하느라 각국은 전쟁을 방불케한다. 정보는 돈이고 세력이다.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은 뜬구름 잡는 듯 공허한 메아리처럼 되었다. ‘두 사람’의 절규는 열 사람의 주장 앞에 어처구니가 없고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치부되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소리나 하나님이 이를 주시기로 했다는 말은 공허하다. 돌아가자! 하는 저들의 말에 백성들은 들고 일어나 모세와 하나님의 뜻에 반격을 가한다. 이내 그 문제를 자신들이 안고 약속의 땅 가난을 목전에 둔 채 광야로 들어가 40년을 배회하다 광야에서 죽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게 문제다. 모세의 절규어린 통회를 들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첫째, 하나님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행하셨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그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우리를 위해 싸우셨던 것을 우리가 다 알면서도 그와 같이 그런다. 둘째, 우리를 안으시고 여기까지 오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 이때 모세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표현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우리가 걸아온 길에서 우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다! 셋째, 기필코 하나님은 우리의 갈 길을 지시하신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그럼에도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 그러니 어쩌겠나?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참으시고 기다리실 뿐, 우리는 이내 광야로 들어가 고단한 삶을 딛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제는 1984년에 녹음된 옥한흠 목사의 새해 설교내용을 들으며 이와 같은 내용을 메모하고 묵상하였다. 들으면서 생각하기를 우리의 불신앙적인 요소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것인지를 알았다. 결국 자기 고집대로 사는 폭인데 그 걸음이 고되고 억울할 정도로 힘에 겨운 까닭은 다들 자신들이 선택한 일이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선택을 일축한다. 천국에 대한 여러 개의 비유의 말씀은 같은 맥락의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져서 복되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9).” 제자들이 물었다.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다. 그 원리는 아주 간단하여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0-12).” 더 알고 싶은 것이다. 바르게 알고 싶은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알 수 없는 마음도 그와 같았다. 요즘은 온통 로이드 존스 목사의 <요한복음 강해>만 읽게 되는데, 어제는 눈도 퍽퍽하고 해서 새해를 맞으며 옥한흠 목사의 녹음된 설교를 들었다. 이제는 귀가 원하고 눈이 바란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것이 영생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5).”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더는 정욕에 따라 썩어질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내가 그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이 그리하심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러므로 바울의 표현처럼 내게 유익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그렇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오늘 천국에 관하여 비유의 말씀을 들으며 주를 더욱 바라게 되는 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더는 판단 받지 않으나 모든 것을 판단할 줄 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이는 문제를 문제로 보고 세상의 여러 정보와 다양한 이치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자, 그 약속의 땅에 이른 것 아닌가? 500여 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다. 거기에 숱한 무리와 족속이 모여 산다 해도 저들이 주인이 아니다. 저들 아낙자손 ‘거인’들에 비하면 우리의 처지나 형편은 메뚜기 같을 뿐이나 어차피 하나님의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기는 한데, 먼저 차지하고 사는 사람들로 주눅들 일이 아닌 것이다. 내 아버지의 것이라. 그런데 정작 좀 더 알아보고 들어가자, 하는 합리적인 생각이 저들을 망쳤다. 정탐꾼을 보낸 일은 불신앙의 결정이다. 사람으로 왕을 세워 통치하기를 원한 것도 타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불신앙의 결정이었다. 그렇듯이 우리가 신령한 자로 살면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면, 이내 주저하게 되고 뭉그적거리게 되고 끌려가다 볼 일 다 보는 신세가 된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절규한다.

 

나의 인생은 주저할 때마다 10년씩 먼 길을 돌아오게 된 셈이었다.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고는 87학번으로 문예창작을 택해 그 길로 갔다. 이후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고 정신없는 세파에 돌아치다 97학번으로 하나님은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순종했으면 좋았을 것을 여러 어려움과 문제들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요구했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여러 정보와 그 가치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서 학부만 끝내고는 다시 또 포기한 것이 10년의 시간이 흘러 09학번으로 신대원에 끌려간 것이다! 나는 저들의 광야 40년이 누구보다 피부로 느껴진다. 나의 지난 시간이 그러하였고, 그때는 정말 그럴듯한 논리와 사고와 판단으로 내 곁의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 조언하였고 저들의 말이 옳게 여겨졌었다. 신령한 자로 판단을 유보할 때 그 길은 멀리 돌아야 하고, 그 길은 자신뿐 아니라 처자식에게도 몹쓸 짓이라. 그래서도 더욱 나의 남은 생을 두고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싶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싶다. 더는 예전처럼 끌려가고 싶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누구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누구 때문에도 기도가 되는 것은 뻔히 저의 가는 길이 보이는데, 저는 미적거리거나 보다 나은(?) 합리적인 선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리에 반박할 말이 없다. 열 명의 정탐꾼의 말이 다 옳다. 힘을 좀 더 기르고, 전쟁할 준비를 해서 들어가는 게 낫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가는 ‘메뚜기 떼처럼’ 몰살당하기 십상이다. 군인을 배출하고 훈련시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누가 나에게 자주 했던 논리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무모할 뿐이다. 난파선에 올라타는 꼴이다. 처와 자식들을 생각해야지! 그때는 그의 말이 옳았다. 물론 나름은 ‘기도해보고’ 결정한다고 한 일들인데, 하나님은 무시당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하면 끔찍하고 한심한 일이다. 나는 이제 확신을 붙든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믿음이 내 것이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 83:1).” 이제 나로 하여금 온전히 주의 길만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