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전봉석 2021. 1. 11. 06:11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태복음 12:33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82:8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것은 일관된 삶의 모습과 비례한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아니면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나무는 좋은데 열매가 좋지 않다든지, 열매가 좋은데 나무가 좋지 않을 수는 없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턱을 괴고 앉는다(마 12:33). 우리 안의 교만이 우리로 정직하지 못하게 한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 13:1).” 이와 같은 말씀을 나에게 더하시는 소리로 들려야 한다. 내 이야기다. 그리 여겨질 때 복이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렘 6:10).” 말씀 앞에 앉아 나의 소행을 돌아보아 주께 바랄 수 있는 마음이 귀한 것이다. 귀가 할례를 받은 것으로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심이다.

 

말씀으로 이끌려 산다는 게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보는 일과 같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7).” 그렇게 말씀은 살았고 활동한다. 나의 관절과 골수를 쪼개신다. 주 앞에 가만히 있는 것이 신앙이다. 내 마음에 꽉 들어찬 여러 생각과 염려와 근심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지지만 그런 나조차 내버려둠으로 주를 신뢰한다. 주 안에서 정직하자.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잠 13:6).” 마음이 어려울 때 어려운 대로 놓아둠으로 주를 의뢰할 수 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시늉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모습이 하나님을 등지게 한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말씀의 정도를 알고 그 책에 기록하신 나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두렵고 떨리는 일은 그럼에도 태만한 자세이다. 그러려니 여기는 안일함에 있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면 마치 모든 게 일시정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공허한 것 같기도 하고 무사히 안착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정말이지 하는 게 그거 하나뿐인 사람이 엄살을 떤다 싶을 정도로 민망하기도 하다. 갑자기 모든 게 소진된 것 같은 느낌? 늘 같은 동선에서 한 날의 행동반경이 일정하면서도 내 안에 어쩜 이렇게 복잡한 실타래가 뒤엉겨있는 것인지. 누구 일이 마음에 쓰이는데 어찌할 길이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모이고 모여,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세상을 더는 기대하지 않으면서 생기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다. 가령 어제 오후에는 베란다에 흥건한 물을 닦고 벽에 얼룩진 곰팡이를 치웠다. 새로 신문을 깔았으나 금세 또 물기가 성겨 몽글몽글 맺혀 떨어졌다. 전에 같으면 비루하고 한심한 일에 마음이 상할 텐데, 이보다 못한 사람들의 생활을 생각하면 감사가 나온다. 이를 지혜자는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잠 13:8).” 이 얼마나 큰 복인가? 굳이 마음 졸일 게 없는 가난이 부당한 재물보다 귀하다. 적당한 부채와 가난이 우리로 근면하게 한다.

 

토요일에는 아내가 동대문 집에 올라가 세 들어 있는 사람들의 겨울나기를 둘러보고 왔다. 오래된 한옥의 남루함이 겨울에는 더욱 취약하여 수도가 동파되고 공용화장실이 꽝꽝 얼었다. 어느 집 보일러가 터져 그 방은 아예 못쓰게 되었다. 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사는데, 대부분이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그 가운데 한 여성은 ‘아픈 아이’를 혼자 건사하며 10년째 그 집에 사는데 그 몰골이 말이 아니다. 동파된 수도관을 고치고 사람을 불러 녹이고, 유난히 추운 겨울 현장을 둘러보고 온 아내는 뜬금없이 우리가 가장 부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못한 삶도 이루 많다. 전날에 아내가 한 말이 마음에 남았는지, 내가 앉아 묵상하는 베란다의 언 벽을 닦아내다 감사가 절로 나왔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가난도 질병도 그 어떤 고단함도 선을 이루시려는 것이라. 오히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6:10).” 그러니 다들 돈돈거리며 사는 세상에서 정신 똑바로 차릴 필요가 있다.

 

감사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셈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더 나은 데 마음을 두고 사는 일은 그래서 위태롭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아픈 마음이 있고, 상한 영혼으로들 산다. 이를 스스로 무장하면 우상숭배가 되고 주께 내어드리면 귀한 제물보다 귀한 것이 되어 주를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은 이를 구하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나는 가끔 이 놀라운 한 구절의 말씀으로 실제의 어려움을 견디게 된다. 주께 아뢸 수 있는 게 은혜였다. 내가 가진 것들은 ‘얼마냐?’의 개념이 아니라, ‘어떠냐?’의 문제로 인식돼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늘어놓으려면 끝도 없지만 그것으로 또한 주를 바랄 수 있는 마음에는 복이 넘친다.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18).”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날들이다. 어느 아이아빠가 뱃사람인데, 귀국하여 코로나 음성판정을 받고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아이는 겁을 먹고 연락을 하였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인데 저마다 안이하기도 하다. 완치 후에도 80%가 후유증을 호소하며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듯 놀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술판을 벌이고, 어느 여행지로 몰려다니는 행보들을 보며, 가만히 있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훈련이란 생각을 하였다. 종종 나는 늙는 연습을 염두에 둔다. 덩그러니 혼자만 남아야 할 때를 생각한다. 내 몸조차 가눌 길 없는 때에 갇혔을 때를 생각한다. 남은 것은 시선뿐이고 생각뿐이면, 그럼에도 그 시간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노인이 되고 갑자기 밀려드는 적적함과 외로움을 무엇으로 감당할까? 손위처남은 올해로 꽉 채운 정년퇴임을 맞는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되심을 알라.’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여전히 마음은 젊은데 몸이 따르질 않고, 몸은 되는데 사회가 원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앞서 겸허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이는 참으로 어려운 훈련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어울려 살고 서로의 왕래로 위로를 받는다. 가만히 있기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 같다.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소린데, 결로현상으로 흥건하게 밴 신문지뭉치를 비닐에 담고 새 신문을 깔고 그 곳 베란다에 앉아 이처럼 새벽이면 말씀 묵상을 하는 일이란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상징 같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시는 말씀이 나는 늘 새벽이면 생생한 일상으로 다가온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고 비루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제 그럴 수 있는, 오늘의, 아직까지의 건강과 이만한 장소와 그럴 수 있는 마음을 귀히 여긴다. 더하신 것으로 ‘가만히 있는다.’ 때론 한 손으로, 오늘은 허리가 조금 아픈 정도로, 그래서 이만큼이나마 움직이며 주어진 한 날을 일관되게 감사하게 하심은,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일이다.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어찌 이루시든지, 놓아두시든지 하나님은 선을 이루실 것이다. 오히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이는 허망할 따름인 것을 미리 알 때 온전한 은혜를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오늘은 오늘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주일 오후, 묘한 감정들이 뒤엉겨 힘들기도 하고 큰 가르침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시 한 날, 월요일 아침에 그만한 몸 상태와 마음과 적당한 현실로의 인도하심이 감사할 따름이다. 누가 어디에서 얼마를 버네, 뭘 하고 살면서 어찌 먹고 사네 하는 따위의 소식에는 크게 괘념치 않는다. 것 또한 저를 향하신 것이고, 나는 다만 그의 이야기에서도 나를 향하신 주의 음성을 솎아 들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을 살며 앞으로의 천국을 맛보아 아는 일을 훈련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시는 말씀에서 흔들림이 없게 하신다. 그렇듯 족한 마음이 복이고 그 마음을 딛고 달려가는 것이 감사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와 같은 고백이 담백하게 나의 것이기를 기도한다. 다들 사느라 팍팍한 세상에서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나라, 우리의 천국을 바랄 수 있는 연습은 주를 높이는 일이다. 이를 앞서 맛보아 아는 것이 한 날의 수고다. 이를 위하여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한 날이 다하고 비로소 새로운 날을 허락하실 때면,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소유였다는 것에 안도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오늘 시편의 기도로 나는 주께 아뢴다. 설왕설래 얼마나 말들이 많은가? 오늘 마태복음을 보면서도, 참 다들 시빗거리를 찾고 갑론을박 말들을 쉬지 않는데서 나는 지친다. 이에 일일이 응하시고 일깨우시는 주의 음성이 내게 들려주시는 이야기로 와 닿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그러하신 이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7).” 이를 일깨우시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8).” 하시는 데서 나는 주일이면 주춤거리고 엉성하던 마음을 바로한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산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 그렇듯 천국은 이미 이 한 날의 수고 가운데, 오늘도 나에게 임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주를 바람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늘 말씀과 함께 말씀 곁에 있기를. 그리하여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33).” 그러하기를. 나의 이와 같은 고백으로 나는 평안할 것이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7).” 그러하여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5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아멘, 한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시 8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