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 19:30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시편 89:21
죽어야 산다. 살아야 영생이 있다. 우리의 핵심은 부활이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구원도 허사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었고 세상에 대해서도 죽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므로 옛사람은 죽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곧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그렇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한다.’ 오늘 아침은 이 주에 마음을 기울이게 하신다.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주저하며 돌아가는 청년을 보고 한참을 머물게 된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저는 자신을 자부하며 주 앞에 왔다. 나름 선과 의를 추구하며 계명으로 살았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머리로, 가슴으로 나름 신념을 가지고 의를 행하고 선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 해도 정작 자신의 그러한 의와 선도 실제의 쥔 것과는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종종 나는 청문회에서 드러나는 정치인들의 이중성을 보고 놀란다. 그처럼 당당히 주장하고 나름 보여주는 삶의 모습과는 달리 가진 게 많으니 숨기고 사는 것도 많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로 예수 안에서 사는 길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죽어야 산다. 살아서 이내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이다.
저마다의 직분이 있고, 그 직분에 따라 서로 다른 사명과 사역이 있다. 모든 게 다를 수 있으나 우리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내가 영적으로 살았다는 증거는 ‘위의 것을 찾으라.’ 하시는 말씀에서 감복한다. 더는 자신이 가진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주를 온전히 바람으로 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룬다. 청년이 그 모든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하나 정작 가진 게 많으므로 고민하며 돌아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 아니라면, 심지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는 결국 주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 주의 살아나심과도 연합하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그리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된다는 것이다. 된 것이면 되게 돼 있다. 찬송을 하게 하심도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우리로 하게 하시더니, 함으로 그리스도와 통일-교제하게 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이로써 우리로 찬송이 되게 하신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나는 종종 이와 같은 원리에 감복한다. 나 같은 게 어찌, 되겠나? 될 수도 없는 나로 되게 하시려고, 하게 하신다. 하게 하심은 때로 풍랑처럼 우리를 몰아세운다.
누가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정부모 일로 한참 힘든데 겹쳐서 시부모로 인해서도 어렵게 하시더니, 엊그제는 신랑이 또 교통사고를 당했다! 비록 경미한 사고라고는 하나 입원까지 하였다니… 저의 어려운 소식들이 겹쳐서 들려올 때 나는 주의 손길을 본다. 그럴 때마다 저는 내게 기도를 부탁하고, 나는 저에게 말씀으로 바로 서기를 당부한다. ‘찬송을 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찬송이 되게 하신다.’ 이 원리는 녹록한 게 아니지만 믿는 자로 살며, 우리의 필연적인 여정이기도 하다. 싫다 한들 어느 인생이 호락호락하겠나? 오늘 시편은 이를 갈무리 하여 일깨운다.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인생으로만 보면 한 생의 여정이 고약하고 너무 짧다. 한데 우리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시려고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32).” 이로써 우리가 주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니. 이는 오롯이 주의 성실과 인자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영광도 높이실 것이다.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24).”
나는 누구의 어려운 사연을 접할 때면 그리 여기고 저를 위해 기도한다. 가만히 주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죄 중에 잉태된 죄인들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한 녀석이 카톡 프로필 사진을 아들애 돌잔치 사진으로 올리며 같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하였다. 녀석은 전에 놀러오면 여러 명의 여자와 연애를 하고, 저들과 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또 헤어지고는 하는 경험담을 신나게 늘어놓고는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결혼한다는 소식도 없이 결혼을 하였고 사진 속의 그는 환히 웃고 있었다. 얼마나 우리가 죄 중에 살았던가.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그러려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 13).” 다시는 내가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 길은 새 생활을 하는 것뿐이다. 이는 나의 지체로 하나님의 의의 무기로 드림이다. 드려지고 내어놓지 않으면, 근심하다 그냥 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과 다를 게 없는 결말이 된다.
여전히 죄를 짓고 죄에 쫓겨 살듯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그리하여 나는 죽었다. 내가 죽음으로 나는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서로들 꿈꾸는 세계가 있고 이상을 붙들고 살겠으나 모든 인생은 죄 중에 있고 그리 된 것은 모태에서부터였다. 날 때부터 죄인이라 우리가 스스로 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당장 이를 증명할 수는 없다 해도 우리 안에는 새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러할 때 어떠하든지 주를 바라게 된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 그러므로 저는 덧붙여 설명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1-12).”
이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 되는 것에 대한 증거를 가졌다.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리 하신 이가 계시고, 그리 행하시는 이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로 바른 주의 길을 가게 하신다. 나는 이러한 말씀 앞에 안도한다. 전에 같으면 갑갑하고 오히려 근심이 되고 반항하는 심정이었을 텐데, 내가 어떠한지 이제는 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누구보다 추하고 더러운 죄 중에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런 내가 살 길은 내가 어찌 해서 선을 이루고 의에 도달해야 한다면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이제 불가능하다는 사실 앞에서도 안도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가 행하시는 결과로 나는 죽었고, 나는 산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게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라는 바울이 증언에 목청껏 아멘, 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누구의 힘들고 답답한 사정을 들으며, 지금은 이를 어찌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이와 같은 진리 앞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안다. 나처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도 이와 같은 주의 기쁨을 알게 하셨는데,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환난 중에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게 됨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문맥적으로는 이 말씀을 받기가 어려운데, 마치 어머니들이 아이의 출산으로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고도 둘째, 셋째를 낳고 그 기쁨으로 충만한 것에서 이해를 구한다.
평안이 강 같이 내 길을 따라오든,
슬픔이 바다 같이 드높이 물결치든,
내 운명 어찌 되든,
주께서 가르쳐주신 말 이것이니 평안하도다
내 영혼 평안하도다
-호레이쇼 G. 스패포드(새찬송가 413)
우리에게는 어찌 설명할 길 없고, 증명하지 못한다 해도 쉴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하는 저 찬송을 내가 좋아하는 까닭은 종종 이상할 정도로 평안하기 때문이다.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근심과 좌절로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이면서도 뭐라 정리하기 어려운 평안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나는 종종 이러한 나를 희한하다고 느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렇게 우리 중에는 먼저 되고 나중 된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이는 우리의 수고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 89: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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