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가 온 것은

전봉석 2021. 1. 19. 06:0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7-28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편 90:17

 

 

모든 게 교훈이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은 경고이고 책망이다. 우연한 일은 없고 괜한 날은 없다. 성경은 일관되게,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그러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안이하고 해이할 때 더하시는 고충이 우리로 각성하게 한다. 일련의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그간의 방종과 허비된 말의 수요를 가늠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표상으로 하는 믿는 자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바울은 고전도 교회를 향해 설교하였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이스라엘은 나요, 모세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애굽은 세상인데 나로 세상에서 건지셨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함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때에 만나와 반석의 물로 나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셨다. 내 안에 여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광야에서 죽이신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 음행과 반항과 원망을 모두 사르신다(7-10). 이렇게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1).”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유익은 우리를 일깨우기 위한 기록이다. 이는 한 마디로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 이와 같은 말씀을 대할 때 저들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들리고, 그들을 일깨우셨던 사건과 사고와 상황들이 오늘의 나를 에우고 있는 것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저들과 같이 그때처럼 간음하지 말자. 주를 시험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이를 경고로 읽고 묵상함이 지혜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6).” 무슨 일이 터졌을 때, 멈춰야 한다.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돌이켜서 다시 주를 의뢰하여야 한다.

 

손위처남댁이 발바닥에 무슨 문제가 생겨 걷지도 못한다고 한다. 우선 침을 맞고 응급처치를 했다는데 아무래도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소견을 들었다. 아내는 통화를 끊고 이제 좀 쉬면서 노년을 즐기려하였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처남형님의 깊은 한숨을 전하였다. 올해로 꽉 채우는 정년퇴임이라.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니 어디 여행을 다니네, 무엇으로 여가를 즐기려하네, 하는 계획으로 올해를 마무리하려는 것인데…. 나는 아내에게 이를 교훈으로 훈계로 삼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그 영혼을 돌아보는 일인 것을 말해주었다. 설마, 하는 우리의 방심과 방기를 일거에 무너뜨리신다. 1993년 세계 최강의 미국 심방부가 뚫렸다. 쌍둥이 무역센터 두 개의 고층 빌딩이 한두 시간 만에 무너졌다. 다른 한 대의 여객기는 워싱턴 국방부 펜타곤을 타격했다. 같은 시간 백악관을 향하던 여객기 안에는 믿음의 청년들이 있었고, 저들은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통화하며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테러범에게 몸을 던져 비행기를 추락시켰다. 그나마 하나님은 백악관을 남겨두심으로 3차대전까지는 막으셨다. 당시 미국의 40만개가 넘는 교회 중에 목회자가 없어 많은 교회들이 비어가고 있었다. 회개가 없으면 망한다. 가장 강력한 미국의 역사에서 저들이 자랑하는 최첨단의 중심인 무역센터와 국방부 건물이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그 일로 최소 3천명이 사망했고, 수만 명의 유가족이 생겨났다.

 

너무 과장하는 의미일까? 손위처남댁의 소식에 공연히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오늘 시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나 역시 오십 중반을 넘어서다 보니 이 의미가 피부로 다가온다. 자, 그러니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1).” 이를 경고로 받고 훈계로 듣는 것이 주를 경외함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 나는 차마 슬픔과 고단한 현실에서 허덕이는 누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였다. 친정과 시댁에 연일 터지는 어려움도 모자라서 신랑까지 교통사고로 입원하며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온전히 주를 의지하자. 오직 주만을 바라자. 행여 나의 이 말이 공허하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다들 얼마나 열심을 다해 사는가. 누구는 억대 연봉을 받으며 스카우트되어 간 직장 일로 목과 허리 디스크로 몸을 돌볼 새도 없이 뛴다. 누구는 친정 식구들과 함께 건물을 올리고 프랜차이즈 업종을 여러 개 들여 직접들 운영하며 불철주야 정신없이 돈을 번다.

 

그러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어 그렇잖아도 쉬려고, 어디 좋은 데 여행도 좀 다니고 누리려고 했는데! 준엄한 말씀의 경고를 듣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일 뿐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참으로 이와 같은 말씀에 순종하기가 불가능하다. 저마다 생각이 있다. 다들 나름 억울할 정도로 열심을 다해 살았다. 이제 좀 그 보상을 누리려 하는데,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만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같은 우리의 생각을 물리시며,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오늘 본문은 그렇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와 상대하신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하시며 품꾼을 모으신다. 한 데나리온의 품값은 엄청난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들어와 열심으로 일한 자가 있다. 한참 뒤 제 삼시, 육시, 구시에도 사람들이 와서 일한다. 은근히 저들에 비해 자신의 수고가 더 크다고 여긴다. 심지어 한 시간 남짓도 안 남기고 제 십일시에도 ‘종일토록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다 일을 하게 한다. 저물매 주인이 청지기에게 일러 품꾼들의 삯을 준다.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였으니 먼저 온 자는 당연히 더 받아야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에 원망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저들의 항변은 일리가 있다. 저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억울할만하다. 그러나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3-14).” 여기서 우리는 문득 나의 나 된 것에 대한 권리, 그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시며 노하시는 주인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15).

 

성경의 이치는 때로 두렵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 인생을 마치 자신이 이룬 공든 탑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허사다. 공든 탑은 무너진다. 나는 어제 낮에 읽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강해집과 옥한흠 목사의 설교 영상을 떠올렸다. 성경의 본문이 각각 다른 곳 같지만 같은 맥락의 설교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홍해를 건넌 우리는 더 이상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애굽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한 향수와 몸에 밴 악독의 습관이 우리 영혼을 쥐고 흔든다. 그래서 또 걸려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엄연히 ‘새로운 피조물’이다. 개보수하여 고쳐서 사용하는 인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 것이 되었다. 세상-애굽은 여전히 나를 끌어들이려 하지만 끌려가지 않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다. 내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었는데 나는 살았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는 저들과 다른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다를 바 없이 불순종의 아들로 살았던 나이다. 그런 나를 위하여, 더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나의 주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7).”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건물을 몇 채 가졌고, 연봉을 얼마 더 받으며 스카우트가 되었고, 그리하여 어떤 대우와 처우와 보장된 미래를 꿈꾸는지는 알겠으나…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이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0).” 그 어떤 수고와 엄청난 값을 치른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존귀한 존재로 삼으셨다. 고작 환갑을 맞으며 이제 남은여생을 얼마나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는가 알 수 없으나,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이내 하나님은 이루신다!

 

꿈꿀 권리는 저마다의 것이겠으나 꿈꿀 의무는 주의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일련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를 바라고 돌이켜 그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은 없겠다. 얼렁뚱땅 또 적당히 넘기면서 여전히 안이하고 해이한 가운데 그 영혼을 놓아두느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시는 오늘 말씀의 속뜻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을 대변한다(마 20:27-28). 고로 오늘 시편의 기도를 천천히 머금고 읊조리며 되뇐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