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전봉석 2021. 1. 17. 06: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8:18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편 88:2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이로써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런 자로 사는 우리의 사명은 막중하였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일, 저를 마음에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엄청난 역사를 이룬다. 어설프지만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메모판을 곁에 두어 간단한 사연을 적는다. 볼 때마다 주님, 하고 부르며 누구를 생각하다 위하여 아뢴다.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을 따라 같은 동선으로 지냈다. 특히 나는 이 이른 아침과 오전 시간을 사랑한다. 이처럼 내 몸을 움직여 이 자리에 앉아 말씀을 끌어다 읽을 수 있다는 감사하고, 일찍 교회로 올라가 꼼지락거리듯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묵상글을 다시 읽으며 수정하고 묵상하는 일이 귀하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을 더 좋아라 하는 것은 아무도 나올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의 시간이 참 고요해서이다. 누구를 생각하고, 무슨 일을 마음에 두다, 어떤 상황에서 문득 <주의 이름으로> 매고 푸는 이 땅에서의 일들이 하늘에서도 같다는 말씀 앞에서 나는 꼼짝하지 못한다.

 

어제는 문득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적어두었다. 첫째,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는 것.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렘 10:2).” 하시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이 내차 마음에 남은 것은 어느 아이 때문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우리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미신적인 문화와 전통에 대하여, 이것으로 서로 위하고 자랑하는 것들을 보면 저애 생각이 난다. 모든 게 ‘하늘의 징조’를 담고 있어 인사를 하거나 소중히 여겨 다루는 것들에 있어, 성경은 ‘너희는 그것을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이고 저애는 그러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왜 그런가? 둘째, 자칫 그러한 사소함으로 ‘사망이 우리 창문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9:21).” 이것이 세상 문화의 결과다. 셋째, 그래서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것이다.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10:3).” 이를 꾸며 벽에 걸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것이 돈벌이가 되고 은연중에 몸에 배는 우상숭배이 되었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저애가 나였고 내가 저애여서, 여기는 우리의 그 사소함으로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하였다.

 

이는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5).” 그럼에도 신주단지 모시듯 몸에 밴 행위대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따라한다. 그러한 우리를 결국 하나님은 우리로 괴롭게 하여 이를 알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18).” 전에 저애도 실은 이런 문제로 다투듯하다 토라져서 갔다. ‘요가는 운동일 뿐이고, 동거는 서로가 좋아서 합리적으로(?) 의지하며 같이 사는 것뿐’이라고 항변하였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때, 저애는 나의 태도를 편협하다고 하였고 기독교는 너무 이기적이라 하였다. 결국 교회를 떠났고 누구와 동거를 하다가 어찌 됐는가, 외국으로 갔다. 연락이 끊겨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가끔 저애 생각을 하면 묵직하니 가슴 한 곳이 뻐근하다. 저애 엄마도 젊을 때는 교회를 다니다 그만둔 사람이라, 글방선생이 목사가 되었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고 아이가 자주 찾는 것에도 호기로웠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는지, 나만 공연히 어려워하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따. 우리의 이별은 간단하였으나 여전히 내 마음은 간략하지가 못했던가보다. 어제는 유난히 저애가 보고 싶었다.

 

결국 우리의 걸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 예레미야의 증언은 성경의 공용이다. 이를 저애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누구에게는 불가능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단순하고 당연하게 되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인생길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한참 때야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 가는 길이 자기 것인 줄 알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그저 우리는 그 길 위에 있었을 뿐임을 알고 황당할 따름이다. 한동안 나도 그 길을 좋아했다. 특히 마음이 어려울 땐 장흥에 있는 중남미 문화원을 자주 찾아갔었다. 고즈넉한 마당에서 남미 어디서 가져온 돌상과 가면을 한참씩 바라보곤 하였다. 그러다 내친 걸음으로 더 들어가면 조그만 사찰이 있는데, 황지우의 시로 유명해진 보광사 벽화, ‘게 눈 속의 연꽃’을 보라 가곤 하였다. 그땐 그랬다. 유난히 그런 풍습에 끌려 가만히 어딜 다니기 좋아했다. 풍경소리나 가벼운 향내를 좋아했고 염불소리나 목탁소리도 정겨웠다. 절간을 내려오다 파전이다 산채비빔밥을 먹기도 했다. 하긴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어릴 적에 조모와 함께 얼마동안 절간에 살았던 기억도 있다. 예닐곱 살이었을까? 짓궂은 또래의 동자승이 장난질을 하거나 마루에 같이 앉아 알싸한 고추된장무침으로 점심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아린 맛은 여전히 입안에 남았다.

 

어제는 그렇게 느닷없고 난데없이 아이가 떠올랐고, 동시에 메모해두었던 성경구절을 칠판에 옮겨 적으며 생각이 멋대로 굴었다. 저애가 나인지 내가 저애인지 분간할 수 없어 혼미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종의 영’에 매인 바 되어 살아왔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러니 모든 TV프로를 장악하고 있고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할 것 없이 모조리 우리 생활 전반을 잠식한 문화에 속수무책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단순히 믿음인데, 저애일 때는 복잡할 따름이다. 이는 구원을 받는 일 그 이상의 일이다. 그러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3).”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러고 사는 일에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데서 오히려 치를 떨어야 한다. 전에는 이것저것 조악한 형상의 문양이나 조각을 모으거나 소리나 음악을 듣기 좋아하였다. 정서적으로 그게 맞아서 나의 영혼은 무르고 터져 상해 있었다. 그런 시절에 만난 저애여서, 순간 그리움처럼 사무치며 궁금해하다 말았다. 마음을 다잡듯 칠판에 말씀을 적어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영생을 요구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제 내 안에 두시는 확신으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곧 우리가 오늘을 복잡하게 사는 것은 간단하지 않은 영생을 살기 때문이고, 복잡한 마음으로 단순하게 사는 까닭은 세상 풍습이 더는 헛것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였다. 저애 말처럼 힘들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이다. 그리 읽히고 여겨 나는 이 말씀이 신비로울 따름이다. 내가 저애를 유난히 잊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그랬고, 그래서 떠났고 싫어했고 억하심정으로 세상 문화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억하심정이란 말 뜻 그대로 ‘도대체 무슨 심정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 수 없거나 마음 속 깊이 맺힌 마음’이다. 어쩜 그러고 살았을까? 느닷없고 난데없는 생각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가만히 돌아앉아 저들의 여러 길을 알고자 하지 말고, 따르지 말고, 이를 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되새겼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여전히 매고 살 것인가? 풀고 살 것인가? 오늘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명징하게 결론을 내리신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지나간 자신을 두고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억하심정’으로는 주의 말씀 앞에 설 수 없다. 어느 아이엄마는 이혼도 못하고 여전히 아이들 아빠를 미워하며 산다. 들어보면 그 사연이 그럴 만도 하겠다지만 그러니 그 속이 다 문드러질 때까지, 손아귀에 힘이 다 풀릴 때까지, 자기만 힘겨운 인생살이일 텐데. 별 수 있겠나? 아이가 아픈 것도, 본인이 주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도, 이내 사는 게 지옥 같은 것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 나부터 풀어져야 한다. 주의 말씀으로 매여야 한다.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경고인가! 여전한 억하심정으로는 별 수 없다. 아,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2).” 애원하고 통곡하고 자복하는데도 여전히 그 짐을 홀로 지고 가야 하는 길 위에서, 나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을 생각한다. 이고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걸음이라니!

 

그래서였구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왜 바울은 이내 십자가를 붙들었는지 알겠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의 세상에 대하여도 그러해야 한다. 이 은사, 말로 다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주의 십자가가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다. 아이엄마의 억하심정, 앞서 저애의 억하심정, 지난 날 나의 그 사무쳤던 억하심정. 이제 이 모든 억하심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못 박음으로 세상에 대하여도 저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14).” 누군가 날 위해 기도했듯이 나 또한 누군가를 위하여 생각하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시는 말씀으로 이끌려 붙들린다. 친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5).” 이 귀한 은사 앞에 감사와 영광을 올릴 뿐이다. 그렇듯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그리하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