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1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 99:9
이 복음을 받아서 무던히 주신 삶을 사는 데서 복이 있다. 각자의 모양이 다르지만 이루시는 하나님의 거룩은 같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을 때면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실까, 기대된다. 어떤 말씀에서 또는 무슨 생각이 나를 이끌어갈지 모른다. 전날의 일을 떠올리고, 메모하였던 글을 펼쳐보고, 누구 생각을 하고, 무엇을 기도로 머금든지 말씀이 주도하실 때 한 날은 새롭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마가는 간결하게 진술을 시작한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는데도 군더더기가 없다. 세례요한을 거론하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이어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는 일에도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2).” 문맥의 간결함은 그 여백에서 한참을 머물 수 있다. 저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는 아는 자를 앎으로 단정하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 확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하루는 늘 같은 동선으로 이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다를 게 없는 듯하나 우리 안의 성령의 역사는 고요하지 않다. 누가 잇몸약과 파스를 잔뜩 부쳐왔다. 누구는 적은 금액이지만 후원금을 부쳐왔다. 그게 어디 날 보고 하는 일이겠나? 받는 나로서는 주의 손길이고 보내는 저들로서는 주를 섬김에서였다.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송구할 때도 있지만 갚을 수 있는 게 기도뿐이다. 위하여 생각하고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되뇌고 아뢰는 일밖에.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어디 시선을 두고 가만히 있다가 불쑥, 내 안에 이는 어떤 마음은 나로 저를 주께 아뢰게 한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때로 막무가내로 이는 확신과 맹목적인 마음으로 이어진다. 순간 낯설고 이상할 정도로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러다 어제 준비하던 설교원고가 떠올랐다. 느닷없는 연관은 마치 서로에게 할 말이 있었던 것처럼 말을 마주하고 마음을 모은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민 13:17).” 마치 글의 전후를 보면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정탐꿈을 보내는 것 같다. 저들이 출애굽 후 일 년남짓 만에 바란 광야에 이르렀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적에 두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다 정탐꾼을 보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선물을 먼저 뜯어보고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자는 소리 같다. 실은 이 명령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저들이 반감을 갖고 일어나면 우리의 인격적인 하나님은 때로 그러라고 하신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신 1:21).” 그렇게 우리 나름의 판단과 신중함이 죄가 될 수 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22).” 가만히 들어보면 이는 하나님을 능멸하는 처사가 아닌가? 이미 500여 년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저들에게 주신 곳이다.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인데, 이제와 마치 뜯어보고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니, 면전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능멸함이다.
공교롭게도 종종 우리는 이를 합리적이라 하고 신중함이라 한다! 저들의 행적이 나의 지나온 길과 다르지 않아 당혹스럽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전혀 모르고 행사할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세월이 얼마나 더 흘러야 하는 것일까? 자녀로서의 권리는커녕 그와 같은 증서-말씀도 볼 줄 모르고, 의미도 알지 못해서 여전히 종들처럼 사는 시간도 허다하다. 그렇듯 반신반의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세례 요한은 훌륭하였고 저를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저보다 크다’는 말씀이 며칠째 마음을 맴돌고 있다. 천하에 그 훌륭한 세례 요한도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하는 회의에 빠져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 하시는 말씀 앞에서 짐짓 나 자신은 어떠한가? 돌아보며 한참을 머물었다. 한술 더 떠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 나의 천국을 빼앗기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천국은 마땅히 주어지는 선물과 같으나 막연히 받거나 말거나 할 게 아니다. 받지 못하면 빼앗긴다.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 저들의 선택은 기어이 광야 40년의 배회하다 모래 위에서 죽는 거였다. 이를 묵상하다, 오늘 시편의 말씀이 일갈한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 전부인 것이지, 저를 사랑함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그의 배경으로 어떤 도움을 얻고, 자신의 출세에 어떤 이득이 있겠나 하는 속셈으로 나누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랑은 그럴 수 있다. 주니까 좋아하고, 받으니까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그때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것은 성장해서의 일이다. 더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살지 못하겠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뻔뻔하지만 담대하게, 송구하지만 감사하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전에처럼 주저하고 망설이느라, 신중함을 끌어들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선물을 뜯어보고 결정하겠다니! 구원의 선물을 또는 이에 맡기신 오늘의 놀라운 사명의 값진 은총을, 뜯어보고 받을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누를 여전히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가 누구신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나? 그런 분이 나에게 화가 될 것을 주시겠나?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물론 자격이나 기준으로 따지면 나 같은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그리 바라고 구할 수 있을까만. 내가 뭐라고 나를 그처럼 사랑하심으로,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런데도 확신을 미루고 보다 신중하게 또는 잘 알아보고 결정하려 정탐꾼을 세우는 꼴이었으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곧 오늘의 내가 아는 이 앎이 눈으로 봄으로 귀로 들음으로 이미 충분한 복이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저의 이 배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줌으로 더하고 비움으로 채워지는 원리였다. 고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당연히 내가 하려고 하면 할 수 없으나 내 안에서 이루시는 이가 계셨으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14).”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 2:12).” 열매를 맺는 일이란 자의적으로나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를 어찌 임으로 구사하고 의도하여 처신하겠다고 되는 것이겠나.
그럴 때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조심스럽고 신경 쓰이는 상대도 있는 것인데, 이 또한 억지로는 안 된다. 친구와 통화하다 저의 이런저런 말에 더는 말을 보태지 않게 되는 경우가 그렇고, 여전히 나는 어느 선생과는 연락하기를 껄끄러워한다. 저의 막무가내인 의사를 나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이다. 가만히 놓아두는 일, 주 앞에 아뢰며 주께서 행하시기를 구하는 것. 이 모두를 지고 가신 이가 계시니 나는 다만 저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내가 이 진리를 질그릇에 가진 것을 감사한다. 자칫 깨지기 쉽고 보잘것없는 주제여서 다행이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에 안도한다. 주께서 쓰심으로, 비로소 귀하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리하여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 이와 같은 놀라운 진리를 간직하면서 그래서 조심히 나를 살필 뿐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 99:1).” 이 두렵고 놀라운 하루하루가 허투루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고로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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