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또는 형제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4-35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편 101:6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형제요, 자매라 하시는 말씀에서 오래 머문다. 그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게 어떤 것일까? 이를 오늘 시편에서는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 101:6).” ‘충성된 자’로 연결되고,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곧 그를 보내신 자의 마음에 흡족한,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은 사람이다. 저의 일이 어떤 것일까?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이와 같이 말씀으로 말씀을 열어주시는 이 아침이 즐겁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날의 사명이 아닐까?
다소의 사울은 바울 되기 전에 자신의 신념으로 열심을 다했고, 열심당원이었던 유다는 이내 예수를 배신하고 은 삼십에 저를 팔았다. 훗날에 바울은 그러했던 자신을 두고 모두 헛된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일을 똥처럼 여긴다고 했다. 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바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자칫 우리의 열심이 우리로 그릇 행하게 하는 것을 일련의 사태(코로나 사태로 숨겨져 있던 온갖 사이비, 이단, 헛된 열심들, 장사치 같은 삯꾼 목사들)로 새삼 우리의 그릇된 열심이 붉어져 나온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를 욕하고 교인들마저 환멸을 느끼며 신앙을 저버린다. 하지만 이 또한 헛된 열심일 뿐.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오히려 내 안의 그릇된 앎, 그 열심에 대하여 돌아보게 된다.
도대체 그럼 우리의 열심, 충성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무엇을 기준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 오늘 본문으로 주신 말씀에서 찾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8-30).” 한 마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우리의 열심을 종교화하고 우리의 신앙을 신념으로 이끌어서 더하거나 빼면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변질시켜버린다. 이를 우리 안의 양심이 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행 23:1).” 그렇듯 우리 안의 양심이란 내가 어찌 이뤄 애쓰는 게 아니라, 저절로 때로는 강제적으로 나를 이끄시는 마음이었다. 이를 베드로는 ‘신성한 성품’이라 표현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도대체 이런 게 어떤 마음일까?
가령 오늘도 알람이 한참 진동하여서 깼다. 주말이라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런저런 마음을 물리치는데 있어, 그냥! 몸을 움직인다.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워 잠을 깨우고, 내 안에는 하루 가운데 이나마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묵상글 한 편 쓰는 일, 일주일에 설교원고 하나 작성하는 일, 소소한 일상 가운데 작은 씨름은 참으로 보잘것없으나 그때마다 우선순위를 가름하는 것, ‘해야 할 것을 먼저 하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하고 나면 해야 할 것은 번번이 밀려난다. ‘아픈 아이’에게도 하루에 성경을 먼저 필사하는 일로 시작하라고 번번이 이르지만 그게 실은 쉽지가 않은지 미루거나 나중에 하려다 매번 놓친다. 가소로운 표현 같지만 다른 것을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을 먼저할 수 있는 것이 우선순위다.’ 좀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일이라 해도 나의 한 날은 그 사소한 일에서부터 하루를 달리한다. ‘나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는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닐까? 뭐 대단히 거창한 게 아니라, 이 보잘것없고 사소한 일상들을 딛고 나아가는 길.
이와 같이 내 안에 두시는 소망의 씨앗,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곧 내 안에 두신 ‘하나님의 씨’와 ‘하나님의 뜻’대로 향하려 하는 마음과 그 실제의 묵묵함은 ‘충성’이었다. 이는 나의 만족이나 어떤 이상과 꿈, 자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확신한다. 모두 주께 맡긴다는 것, 바울의 고백처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내가 옳다고 여기며 열심을 다하던 것으로부터 놓여나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곧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으로 나의 소중함은 사소함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새벽 시간을 놓칠 수 없고, 허접한 나의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이제는 확신하기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있나? 이 마음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하는 바울의 진술을 나는 사랑한다(빌 3:7-9).
그래서 나는 누가 뭐라든지 혹은 동조하든 반대하든 개의치 않게 된다. 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다시 말하면 오늘도 나로 움직일 수 있는 여력과 행할 수 있는 몸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느린 걸음이나마 말씀 앞에 앉아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게 최우선이 된 것에 감사한다. 더는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두고 열등감을 갖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그럴 때도 있어 주를 바라는 것으로 남들보다 복이 많다는 생각을 더한다. 누구의 판단도 꺼려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서조차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나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말씀에 나는 기꺼이 동의하고 감사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것이다. 사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 죽음 너머의 세계를 확신하면서부터이다.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가지고 지난 한 주간은 설교원고를 작성하며 말씀을 준비했다.
실은 손위처남이 장모와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주일이라, 올해로 정년퇴임을 맞는 저와 연로하신 장모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염두에 두고 있기도 했다. 그런 것이 코로나 재확산으로 오지 못한다 하니, 어떤 서운함이 잠깐 들었다가 내내 그 말씀이 날 위한 것이란 사실 앞에 새삼 감복하였다. 시편 42편은 시온 시다. 150편의 시편들 가운데 시온 시로 분류되는 일곱 편의 시는 42, 43, 121, 122, 125, 126, 129편의 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온은 하나님이 계신 곳, 그의 뜻이 완성되는 것, 우리가 들어갈 본향, 궁극의 나라, 하나님의 도성을 일컫는다. 그렇게 누구의 어떤 사연을 마음에 두고, 또는 로이드 존스 목사나 존 번연 목사 등의 신앙 서적을 읽고, 누구와 통화하며 메모하였던 저의 사연으로 말문을 열듯 말씀으로 다가가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다. 누가 듣든지 혹은 읽든지 어쩌든지, 나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처럼 또 하루를 ‘해야 할 일’로 묵묵히 준행하는 것이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이로써 형제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렇게 예수께서는 나로 형제를 삼으셨고 사랑하셨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또는 형제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4-35).” 오늘 아침은 이 말씀으로 나를 여기까지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 13:1).” 일련의 상황이나 사태를 두고 훈계로 삼자.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렘 6:10).” 그런 시대이든지 어떻든지 내가 누구를 뭐라 할 것도 없다. 나로 형제를 삼으신 주를 바라보며,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 101:6).” 하시는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으로 되뇐다.
이를 바로 알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나의 충성은 어떤 게 있을까, 하고. 그러므로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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