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17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편 100:3
스스로 남들보다 낫다 여기면 답이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고, 금식하지 않고, 안식일을 섬기지 않는 데 따른 저들의 반감에 대해,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우리가 주의 빛을 보고 긍휼하심을 깨달을 때는 어둡고 곤핍할 때이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바울은 이 복음의 놀라운 은총을 그리 알고 있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2-13).” 곧 내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을 때 주가 살리셨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크게 공감한다.
돌아보면 내가 함부로 주를 멀리하고 지낼 때에 주는 나를 돌보시고 위하여 여러 일을 도모하시고 곁에 돕는 손길을 함께하게 하셨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이를 이제서 아는 것이 송구하고 면목이 없을 뿐이다. 오늘 시편은 새삼 이를 일깨우신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이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주를 멀리하거나 너무 의도적으로 가까이 하려 든다. 멀리하는 거야 그렇다 해도 의도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가까이 하려 드는 것이 또한 얼마나 가증한 일인가를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련의 사회 사건도 다르지 않다. 이제는 ‘기독교’가 아니라, ‘개신교’라고 콕, 짚어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속상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이쪽에서는 교회 탄압이라 외치지만 다들 어지간하다. 교회를 등에 업고 영어 교육이나 영재양성이나 하는 사설기관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늘었다. 취지가 어떻든지 적당한 허영과 사회적인 욕구가 맞물리면서 속된 말로 장사가 되는 것이다.
목사인지 장사꾼인지, 선교사인지 사업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주목을 받는다. 설교는 선동에 가깝고 사람들은 쓸려 다니며 한데 모여 유행처럼 와글거렸다가 사라진다. 내 곁에도 더러 그런 위인들이 있었다. 일부러 큰 교회를 선호하고 소위 유한마담들의 무리에 끼는 것을 무슨 성도의 교제로 여긴다. 저들의 봉사활동이나 무슨 행사는 자기들 만족에 가깝다. 전에 어느 목사가 가끔씩 와서 차를 마시고는 했는데, 한 번은 무슨 지역사회 모임에 목사들이 참여하기로 했다며 같이 하겠냐고 물었고, 한 번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어느 집사가 무슨 사업을 하는데 무슨 이사로 자신을 올리고 나더러도 같이 하지 않겠냐고도 했었다. 그때 저에게 말한 게 ‘목사는 그러면 안 된다!’ 하는 일침이었다. 내가 아는 길은 그런 게 아니라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저에게도 그런 일은 함께 하지 않았으면 하고 권하였다. 아무튼 그 뒤로 소원해져 발길을 끊었는데, 일련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그러게, 나는 너무 열심인 인생에 대해 경계한다. 그것은 충만함을 누리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
그런 걸 마치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를 무마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로 나는 경계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4-5).”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이루시는 세계가 아니다. 오직 주의 긍휼하심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나태하게 살라는 소리가 아니라, 묵묵히 주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로 해야 하는 것을 감당하면 된다. 그때 같은 층의 교회 젊은 목사에게도 그런 소리였는데, 어찌 오해를 하였는가… 더는 왕래가 없고, 다른 층으로 옮겨 서너 교회가 연합하며 뭔가를 한다. 아무튼 난 잘 모르겠다. 저가 옳은지, 그 사업이 주를 위한 것인지. 다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6-7).”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셔야 할 일이다.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 일이다.
오늘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두고 나는 일련의 사태를 짐작하였다. ‘개신교’에 대한 환멸이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데에 나는 속상하다. 저들이 교회 이름을 들먹이고 목사임을 자부하며 성도들로 끌어 모아 ‘그 짓’들을 해대는 것에 분개한다. 영어로 성경을 읽네, 구약을 암송하네, 선교가 어떠네 하는 것들이 다 유행처럼 떠돈다.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무슨 선교, 어떤 단체 하면서 이는 마치 안개처럼 불려 다니는데, 과연 우리 스스로 그처럼 의롭고 선할 수 있겠나?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얼마나 선한 의도로 무슨 일을 모의하고 작당하고 추진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 또한 사람에 대한 환멸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신물이 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릴 때부터 나는 교회에서 자란 터라… 좋을 때야 다들 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다 무슨 일이 터지면, 드렸던 헌금도 도로 내놓으라고 하는 위인들이라.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밀착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신다. 아니 하나님은 바라시지만 우리의 본성이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꼭 두세 사람이 모이면 탈이 나게 돼 있다.
불가근불가원이다. 적당히 떨어지고 적당히 붙어야 한다. 소위 자기중심성이 얼마나 강한지, 입에 혀처럼 굴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철천지원수가 되는 게 비일비재하다. 성도란 하나님만 바람으로 그 앞에 모이는 것이지, 이를 끌어들여 세력화하고 어떤 사상이나 이념으로 몰아가면 영락없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지 사람이 거들 수 있는 게 없다. 우리의 개입이나 관여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이를 선동하여 사람들이 모여 무엇을 도모하려 하는 것부터 뭔가 주의해야 한다. 성도의 교제도 그런 게 아니다. 보면 그 안에 꼭 다단계나 보험 하는 이들이 있고 저들의 열심은 남다르다. 이를 정치화하여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끄는 무리도 있는데 보면 꼭 자신이 두각을 나타낸다. 물론 사람들이 몰리고 한데 엉기는 것 같지만 적당히 서로의 허영과 허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나를 신뢰하지 않다보니 누구도 사람을 보고 좋아라 하지 않는다. 전에는 물론 사람이 너무 좋아서 저들과 어울리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며 살았지만 모든 게 헛되었다. 심지어 아내와 둘이 뭘 같이 하려 해도 안 맞는다! 단순히 성향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심한다. 사람과 사람이 밀착되면 그게 어떤 사이든 탈이 난다.
모르겠다. 나에게는 말씀이 가까울수록 죄만 드러난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그러니 나는 죽어야 산다. 이를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아야 할 것 같고, 살기 위해 열심을 다하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딜 기웃거리고 뭐든 들쑤시곤 했는데, 결코 그것으로는 주를 가까이 할 수 없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는 어림없다. 그렇듯 수고하면 자신의 수고에 따른 보상을 바라지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지 않는다. 굳이 저의 충만하심으로까지 거할 건 없는 것이다. 희한하지? 스스로 열심이어서는 겸손이 없다. 거기에 사람이 모이고 돈이 되면 그야말로 영락없다. 일련의 사태를 여러 기사로 읽으면서 또는 이를 교회 탄압이나 박해로 맞서는 입장도 살피면서 나는 자꾸 이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각자의 것이 있는데 이를 규격화하고 획일화하려 하니 그 사단이 나는 것이다. 본래 다 견물생심이고 그에 따른 자화자찬을 스스로 벗어나기는 불가능한 법이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 이를 오늘 시편으로 알게 하신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우리가 할 일은 송축이다. 주께 감사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맡은 바 없다. 곧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 그러니 얼마나 귀한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2).” 부디 다른 데 눈길 더하지 말고,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그럼 됐지, 뭘 더 어찌 더해보려고 그리들 아등바등 남들처럼 살지 못해 안달일까?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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