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35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시편 106:43
주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주의 사랑이 내 안에 더욱 거하시기를 원한다. 그 사랑은 소망을 가지게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얕은 물가에서 표적만 일삼는 세대를 주가 떠나신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2-13).” 주를 사랑하면 다만 기쁨의 깃발이 펄럭이며 내 안에 주가 계심을 알린다. 슬픈데 괜찮고, 우울하다가도 감사할 따름이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에 그 사랑을 위해서면 이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을 준비가 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말씀 앞에서 가만히 그 뜻을 음미한다. 과연 나는 어떠한가? 바리새인들과 다수의 군중들처럼 그저 표적만 구하고 어떤 바람과 기대로 요구하는 것들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아닐까? 아,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시 106:43).” 이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인지. 그런데 나 또한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속상하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여기며 살고 있는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리하여 나의 약함이 나로 자만하지 않게 하고 오직 주만 바라게 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이를 정녕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받고 사는지. 나는 자신이 없고 면목이 없어 송구할 따름이다.
그러니 주의 긍휼하심이 대단하다. 그런데도 나의 부르짖음에 돌아보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시 106:44).” 그뿐인가?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5-46).” 나 같은 것을 무엇 때문에 그처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일까? 나는 주를 사랑할수록 나를 사랑하시는 주의 사랑이 이해가 안 된다. ‘나 같은 죄인 살리려…’ 그러므로 나는 보이는 것으로는 행할 수가 없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보이는 것은 염려와 근심뿐이다. 불안과 갈등도 더해진다.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다.
어제는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였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 43:1).” 오직 나로 주께만 판단 받게 하셨다. 이는 놀라운 사실로 더는 누구의 판단도 개의치 않게 된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3).” 이는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해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 어째서 내 안에 이런 변화가 생겨났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전에 그처럼 찾고 의지하던 사람들로부터 놓여났다. 바라고 구하던 것들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자신에 대한 환멸과 서러움에서도 무뎌진다. 아예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에처럼 나를 휘두르지는 못한다. 가끔은 누가 보고 싶고 어떤 일이 그립다. 누구의 소식에 축하하는 마음과 동시에 시샘하는 마음도 있다. 어떤 불편한 마음이 분명 내 안에 들기는 든다. 그런데 별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퍼진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5).” 곧 내가 판단할 일은 없다. 판단 받을 일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주께만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고 다행인지 모른다. 전에는 그처럼 옥죄던 사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이제는 그야말로 천만다행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아, 나는 이제 이 사실이 좋기만 하다. 어떤 이유로 안정제를 더 먹어야 했다. 먹기 전 그때의 불안, 공포감은 정말 싫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니까 별 걸 다 끌어다 걱정하고 있다. 단지 느낌이 아니라 몸이 따라서 반응하며 느끼는 고통이라, 안정제를 삼키고 가만히 주의 이름을 되뇌며 눈을 감는다.
나는 종종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현실에 당황한다. 가령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아니 이처럼 묵상글을 쓰며 특별히 염려할 거 없는 상황인데도 덜컥, 그러한 공포가 나를 휘감으면 초조함은 금세 숨을 못 쉴 것처럼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온다. 이율배반적이란 말 그대로 앞뒤가 안 맞는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자, 내가 주를 사랑한다. 내 안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과 평안도 있다. 그럼 그에 걸맞은 의연함과 평온함이 느긋함으로 내게 주어져야 옳은 게 아닌가? 시편은 이를 주께 물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는 심정이 딱 그렇다(시 43:2). 그렇다고 훨훨 날아 도망칠 수도 없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55:6).” 분명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불안과 초조함을 병적으로 지니고 살 게 하시는 것일까?
누가 말한 것처럼 애써 나름은 신앙으로 믿음 안에서 열심을 다해 사는데 하나님은 뭐가 마땅치 않으신지 하는 일마다 훼방 놓으시는 것 같다. 나는 저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만하면 기특하고 훌륭한데 뭘 더 바라시는 것일까? 어제는 아무 이유도 모른 채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으면서 진정을 시켜야 했다. 요즘은 이유도 없다. 변덕스러운 날씨 같고 종잡을 수 없는 바람 같다. 그럼에도 내가 좀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은 ‘그런가보다’ 한다. 더는 ‘왜?’ 하고 오래 따져 묻지 않는다. 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만 하루치 안정제를 다 삼키고도 모자라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한 알을 더 삼켰다. ‘그럴 때도 있지!’ 하고 만다. 더는 이런저런 상태에 대해서 기를 쓰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도 다 아신다!’ 하는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일부러 그리 두시는 은혜’로 보았던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9).” 나도 이를 붙든다. 오늘 내게 두시는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행여 내가 나로 걸려 넘어질까 하여,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게 전부라면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텐데, ‘주의 빛과 진리’는 나를 이끄시고 있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나는 그게 설교원고로 그치지 않고 내 생활에 먼저 일궈지는 일이어서 놀랍다. 복음이 아무리 귀한들 내 일상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처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전부 내 이야기인 것이라, 뜬금없이 친구가 후원헌금을 입금했다. 교회 통장이라 알림이 없어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또 한 친구는 김치를 보냈다며, 그렇게 마음을 썼다. 잇몸이 좋지 않고 허리가 안 좋은 것을 알고 누가 또 좋다는 영양제와 파스를 보냈다. 그와 같은 마음이 나를 보고 하는 것이겠나? 내가 뭐라고 그리 마음을 쓰겠나? 마치 나에게는 말씀도 같다.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부터 전부 내 얘기다. 나는 누구처럼 하나님 앞에 자부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다만 그러할수록 주만 바라고 인정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나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지, 나의 약한 것이 나로 알게 한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는’ 것처럼, 약한 것을 아니까 더 챙겨 먹고 잘 다독이는 것처럼,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이제는 홀가분하다. 더는 세상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친구를 찾아 저와 어울리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무엇으로 업적을 삼거나 보람을 느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더는 그런 데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감사히 여긴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생활이어서 감사하다. 이 땅의 모든 장막은 무너진다. 늙거나 젊거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장막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2).” 이 땅에 새로 지을 장막은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자책하거나 누구의 판단을 받는 일보다 허망한 일도 없다. 이제 나로 사모하게 하심이 하늘에 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아! 이와 같은 말씀 하나면 그 어떤 보증도 다 필요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는 알겠다. 하여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오늘 이 말씀이 나로 이제 든든하게 한다. 고로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 됐지 뭐! 뭘 더 필요할까?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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