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마가복음 10:15-16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시편 108:6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속에 답이 있었다. 말끔하니 다들 별 탈 없이 잘들 사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과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모양은 확연하게 달랐다. 세상은 늘 우리를 부풀려 자아를 부추기고, 자기만족은 그 어떤 허상보다 정교하게 남은 물론 자신을 속인다. 그래서 늘 말씀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이를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져오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5-16).”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히 알고 위하여 우러르는 것이겠다. 그런데 그게 그처럼 어려운 까닭은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23).” 스스로 좀 있는 것으로 이를 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이 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덮기도 한다. 알만한 신앙이었으나 당장의 결정으로 하나님을 저버렸을 때, 얼추 그 아이도 마흔 중반이 되었을 텐데 여전히 사는 게 지옥이다. 나이 많은 신랑은 의처증으로 저를 교회에도 못 가게 한다. 좀 나을까 하여 선택했던 어린 날의 길이 평생을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모처럼 누구 소식을 듣다 마음이 너무 아파 생각을 그만두었다. 또 누구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미가 중풍으로 쓰러져 십 년을 앓아누웠다. 말이 쉽지, 긴 병에 장사 없다. 엎친 데 덮치는 게 인생살이다. 구구한 사연을 듣다보면 내가 질식할 것 같다. 어느 교회 목사는 곧 큰 딸이 출산을 하루 이틀 앞두고 사산이 되었다. 어쨌든 죽은 아이를 산모가 혼자 힘으로 밀어내야 하는데, 몇몇 교인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것이 누구에 의해 전체 방에 공개되고, 선의로 그렇게 됐다고는 하나 당사자들이 듣고 더 큰 실의에 빠졌을 법도 하다. 누구는 이런저런 말을 하다 운다. 운전 중인 것 같아, 나는 저를 달래느라 더 마음이 쓰였다. 그야말로 다들 사는 게 지옥이다! 제자들은 허상을 바라듯 예수님의 보좌 양편에 앉기를 청하였고, 저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함에 대해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그러니 우리네 삶은 무지함으로 고달프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1).” 이를 바울의 시점으로 다시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나는 누구의 그런저런 사연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더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삶이란 복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앞에 두시고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4-25).” 누구에게는 묘연하여 불가능한 일과 다를 게 없으니, 이는 저의 가진 것으로 저의 족함 때문이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그 삶이 귀하였다.
마침 저와의 통화에 앞서 나는 설교원고 중에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대해 정리하고 있었다. 주를 의뢰하는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 나는 저에게 그와 같은 말씀을 들려줄 수 있어 신기하였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2).” 얼마나 자주, 우리는 그와 같이 걸려 넘어지는 자리에 처하고는 하는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심을 잘 아는데,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이 끔찍한 상황이 거듭되는가싶을 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하는 시인의 기도가 귀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이처럼 주께 아뢰고 고하며 구할 수 있는 삶이다. 남들과 가장 다른 점이 이것이다. 우리의 다름은 내가 바라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가 아니면 이 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어릴 때부터 참 예뻐라 했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저도 마흔 줄에 들었고 아이 셋을 둔 엄마가 되었다. 두 번의 자살기도와 출산 후유증으로 당뇨를 얻어 오늘도 인슐린을 달고 산다고 하였다. 가만히 지난날을 돌아보면 정말이지 불순종의 선택이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고, 그로 인한 하나님 없는 가정에서의 시집살이란 게, 430여 년의 애굽살이보다 지독하고 40년의 광야 생활보다 끝이 없다.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는 저의 이야기로 나는 숨이 찼다. 우리의 한 이야기에는 수만 가지의 사연과 또 다른 이야기가 이야기와 뒤섞인다. 어느 것을 하나 풀자니 이것저것 다른 것이 걸려나오는 사연이 끝도 없다. 아, 나는 질식할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지난날이 어떠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그동안 무슨 일이었고, 어째서 그랬는지가 아니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이 귀하다.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다른 더 좋은 수를 성경은 말할 수 없다. 나도 알지 못한다. 저마다 사느라 산다고 기를 쓰며 살지만 그 삶이 참으로 고달파서 사는 게 다들 지옥 같다. 저마다 들춰보면 카펫 아래에 쑤셔 넣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덮어둔 사연들로 수북하다. 그러니 당장은 좀 살만하다 싶지만 번번이 발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고 등이 배겨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모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0-11).”
주가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기이할 따름이다. 십년 누워 중풍을 앓던 이는 주를 구주로 영접하고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저이가 죽자 기껏 병간호로 지극정성이던 늙은 신랑은 한 달도 안 돼 다른 여자에게로 갔다. 그러니 ‘자기 재물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일이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다.’ 차라리 저도 몸져누워 주의 도우심에 간절하였더라면 그 남은 생은 어땠을까?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16).” 나름 자신에게 있는 것이 도리어 자신을 건질 수 없는 수렁에 도로 빠뜨린다. 아직 남은 건강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산이나 유용함이 우리로 하여금 그릇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이미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을 이는 이대로 두고 다른 걸 더 포개려 함으로 저는 흥하시지 못하고, 나는 쇠하여질 리가 없다. 예수 이름 외에 성모 마리아를 두고, 여타 종교의 위대한 지도자와 나란히 하여 종교화합을 운운하려 드는 이들의 얼토당토 않음에 대하여.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러지 말란다고 들을 것도 아니고, 기어이 살아서 사는 동안에 돌고 돌아야 하는 광야라면 어쩌겠나? 그러고 사는 게 또한 저들에게 맡기신 길이라면. 이내 살아서 그 생을 다하는 수밖에. 누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모처럼 연락이라도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저의 사연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의 구주로 족하였다. 이 땅에서야 저보다 백배는 비루하고 궁색한 살림이라 하겠으나, 나는 저가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 10:21).” 앞서 저가 보였던 선을 구하는 일이란 게 얼마나 추상적이고 낭만이었던가?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차라리 잃는 게 얻는 것이고 죽는 게 사는 것이다. 저가 차라리 없었더라면. 비루하여 주 앞에 엎드릴 수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니 내가 누구 말에 무슨 말로 더할 수가 있겠나? 같이 훌쩍거리다 목이 메여 입을 다물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주 앞에서 나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고, 아뢰지 못하나 나를 품에 안으시는 사랑이시라 그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 또한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하는 송구함과 부끄러움뿐. 무슨 말로 나를 두둔하고 변명할 수가 있겠나? 이제는 다들 나이가 중년을 넘어 살만큼 살았는데도 여전히 그 걸음은 광야에서 겉돌고 있을 뿐이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12).” 어쩌겠나? 나는 다만 말씀 앞에 앉는다. 누구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속상하고 어려운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른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 108:1).” 곧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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