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2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107:19-20
기도와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나를 죽일 수 없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애를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 씨름하는 게 우리의 속성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다(막 9:35). 그리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6, 37).” 곧 내가 내 의지로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들을 건사할 수 없다. 일그러진 나의 속성은 오히려 저들로 인해 상처 받고 저들에게도 상처가 된다. 주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내게 붙이시는 영혼이다. 주의 마음이면 내가 상처 받지 않는다. 저가 나를 어찌 여기고 뭐라 하든, 주의 사랑으로면 서운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를 어찌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오늘 말씀에서 <기도와 말씀>으로밖에는 길이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감정이 뒤틀리고 내재된 여러 응어리가 마치 부유물이 일듯 사소한 것으로도 마음을 휘젓는다. 바울은 그래서 성령의 어느 은사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일렀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성령의 모든 은사는 소중하다. 그러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을 하려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내가 판단하고 인지하여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 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마음이 그럴 수 있으려면 몸을 쳐서 복종시킬 필요가 있다. 해서 나의 정해진 아침 시간을 나는 귀히 여기고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이렇듯 묵상글을 쓰고 오전에는 교회에 나아가 이를 다듬고 재차 수정하며,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예언은 곧 성경이다. 성령의 은사도 소중하나 성령의 열매가 더 중요하다. 은사의 소임은 열매를 얻는 것이다.
거기에 가장 걸림돌이 나의 자아다. 나의 기분, 생각, 판단과 고집 등으로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자신을 겨누고 못살게 굴기도 한다. 우리 영혼이 피폐되는 이유다. 추구하려는 자아성취가 마치 소명인 줄 알기 때문이다. 목회도 단념하게 하고, 사랑도 접고, 누구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데 열심을 다하게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걸 목회로 알고 사랑으로 인식한다. 자아는 소심하지만 이처럼 잔인하다. 이내 자기를 사랑하는 데 있어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불같다. 오늘 말씀에서도 왜 말씀을 읽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정해놓고 성령으로 읽을 수 있는 숙련된 시간이 필요하다. 한 번 두 번 되풀이하여 몸에 배야 한다.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긴 나의 이 묵상글을 나는 귀히 여기며 잃지 않으려 하는 이유다. 너무 얽매여 종교화된 게 아닐까? 미신적인 행위는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면서도 강행한다. 까닭은 두 가지 아주 사소한 마음으로다. 하나는 나의 하루의 구심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를 수시로 읽고 되새길 수 있어서이다.
거기에 하나를 더하면 그 유익을 알기 때문이다. 하루의 모든 내용이 이 시간으로 집약된다. 메모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떠오르는 주의 뜻을 분별하여 적는다.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한낱 글재주가 되지 않도록, 내게 말씀은 그때마다 일침을 가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3-25).” 다시 말해 말씀은 보는데 있어, 이게 거울을 보듯 하면 곧 돌아서서 제 모습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자유롭게’, 나는 이 글쓰기로 인하여 말씀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시고 실천하고자 하는 행함을 더하신다. 이를 사모함으로 이 시간이 귀하다. 이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내가 나의 자아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이다. 묵상글을 쓰고 그것으로 그만큼만이라도 자라가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나는 거룩을 가늠할 수 없다. 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혐오스러운 모습과 마주할 따름이다. 말씀으로 주의 영광을 보고 사모하는 수밖에. 수시로 나는 흐려지고, 연기처럼 뿌옇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 6:4).” 누구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어떤 일로 마음이 뒤틀리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5).” 두려움은 일거에 나로 하여금 주를 의뢰하게 한다. 주께 엎드리게 만든다. 그러할 때 일련의 모든 사태는 자연과 삼라만상이 그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이를 목격하는 시간이 이 아침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죽었다 깨어나고 우리는 피조물일 따름이다. 당리당략에 따른 말의 천지는 연기 같다.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일까? 같은 사안을 두고 자신들이 이로울 방향으로 말을 해석하고 지어내고 부풀린다. 저들의 말질에 환멸을 느끼다 그게 나를 두둔하려 드는 나의 말과 다르지 않다는 데서 털컥, 겁이 난다.
우리는 모두 주 앞에서 결산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그때 우리는 무엇으로 주 앞에 설까? 심판을 알려 주는 말씀 앞에 겸허해야 하는 이유다. 싫든 좋든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며 병들어 간다. 어제의 오늘이 내일이 될 리 없다. 하루하루 우리는 죽음으로 나간다. 평소 말씀으로 몸에 밴 자세가 아니면 겸손할 수가 없다. 나는 한 게 없고,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조차 없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니 대체 무슨 힘으로 그 앞에 설까?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11).” 평소의 말씀뿐이다. 말씀으로 인한 기도뿐이다. 사람들에게 외치고, 나서서 주동이 되어 이루었던 업적으로 주 앞에 살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아, 그때에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평소 외치며 하던 말로 남는다.
나는 죽어 사소하다. 자꾸만 내가 쇠하여 가는 것이 좋다. 내가 쇠함으로 주의 영광이 흥하기를 바란다. 주가 흥함으로 나의 쇠함은 주의 영광을 보는 발판이 된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모두는 모두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사랑하는 자식도 부모도 서로가 상처가 된다. 나는 나에게 생채기를 내듯 자책하고 괴로워하나 소용이 없다. 자아가 여전하여 ‘너 때문에’ 하는 원망이 한데 뒤엉긴다. 하나님이 그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찌 대하셨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을 모세를 다윗을 하나님은 하나하나 일일이 마주하셨다. 그때 저들은 자신의 덧없음을 알았다.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뿐임을 알았다. 이를 바라고 사모하는 것뿐임을. 하여 스스로 추구하던 가치가 얼마나 허상이고 헛것인지를 알았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거장들도 그렇게 자신을 죽임으로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을 누리었다. 이를 알겠는데, 어째서 나는 힘들까? 그것은 나에게 빠져 있어서이다. 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바 그 이상과 현실을 포기할 수가 없다. 자식에게 너무 신경 쓰고, 아내와의 관계에 너무 애쓴다. 자신을 돌보느라 너무, 너무 정신이 없다.
삶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근심에 싸여 가만히 서서 응시할 틈조차 없다면
-데이비스 W. H. Davies
때로는 그냥 냅두 듯 ‘가만히 서서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저 시인의 표현처럼 그렇지 못해 우리는 너무 안달이 난다. 마음이 쩔쩔매고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한다. 곁에 가까운 이가 제일 힘들다. 나로 인해 내가 제일 피곤하다. 피곤해서 상처 받는다. 그런 아픔에 다시 조바심은 더해가고, 대체 이러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만히 서서 응시할 틈조차 없다면!’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
너 주 안에 있어 늘 성경보고
온 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 하기 전마다 너 기도하라
-샌더랜드 (새찬송가 420장)
나는 오늘 말씀을 축약된 의미로 다시 읽는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그러면 말씀을 보내신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9-20).” <천로역정>에서 존 번연은 언급하였다. “잘 살고 싶으면 마지막 날을 끌어와 늘 자신을 지키는 동료로 삼아야 한다.” 오늘 여기에 있다가 내일은 없을 수 있는 게 사는 일이고, 내가 그처럼 애지중지하는 모든 자아의 산물이었다. 일찍이 바울은 이를 알고, 부디 자신을 시험하여 바로 서라 하였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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