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시편 112:5
결정적인 순간에 판가름이 난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우리의 호언장담이 얼마나 무색한가. 이를 빗대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1-52).” 어슬렁거리듯 따라 그리 살 줄 알았던 자의 결국이 수치스럽다. 주를 따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말씀을 전하면서 성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럴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오늘의 우리 믿음을 점검하게 된다. 저들은 마치 자기 자신을 두고 기소장을 쓰는 사람들 같다. 스스로 전한 말과 증거 하였던 말씀이 자신을 고발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한 청년이 누구인지, 왜 저러한 복장으로 예수를 따랐는가, 알 수 없으나 상징하는 바가 크다. 어디 구경 온 사람처럼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고 따르다 그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베드로의 장담도 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막 14:31).” 생각하고 다짐하는 것과 다른 게, 우리가 두른 벗은 몸 위의 홑이불 같다.
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홑이불을 두르고 어슬렁거릴 간단한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4-17).” 그러나 저들은 아직 이를 갖출 능력이 되지 못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기도밖에는 이를 갖출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 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목회는 얼마나 팍팍하면서 어수룩한지. ‘한 청년의 따름’이 던져주는 의미가 크다. 그저 벗은 몸에 홑이불이라니!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혹시 그 홑이불을 두른 것 같은 말씀으로 주를 사랑하고 의뢰한다고 하지는 않는지? 그 정도 믿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 예수를 따른다고 따라 나선 길은 아닌지?
우리 곁에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무리가 많다. 저들은 의외로 강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8, 19).”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에 서야 한다. 나를 두고 인치심이 있어야 다. 주께서 나를 아셔야지 내가 아는 것은 소용이 없다. 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로 하여금 진리로 띠를 띤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의의 호심경을 가슴에 붙였다는 든든함이 들어야 한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걸음을 딛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방어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다. 베로 짠 홑이불로 설마 굳건하다고 여기며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꽉 쥐고 담대하게 걸어 나아가는 길이 맞는 것인지? 설마 저 청년과 같이 벗은 몸에 홑이불만 걸치듯 간단하게 여기며 주를 따른다고 따라 나선 것은 아닌지?
한 날의 걸음이 그러하고, 누구를 대하는 마음에도 그러할 때도 있다. 멀쩡하고 아무렇지 않을 때에야 그 정도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충분한 것 같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어김없다. 그렇듯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은 우리의 믿음은 삽시간에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평소 그만큼 단단한 삶을 요한다. 물렁하다가는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불러 친구여! 하며 저를 돌이키려 하셨고, 그럼에도 친밀하게 대하셨으나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마 25:50).” 우리 마음을 우리는 감추고 숨겨서 남을 속이고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주는 다 알고 계신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호언장담도 그러했고 유다의 능청맞은 처사도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도 받아들이셨다.
이만하면 깨달아 알 수도 있었을 법한데 그게 그처럼 어렵고 불가능한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읽어야 한다. 말씀을 읽고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서적을 읽고 사람들의 마음도 읽고 돌아가는 정세도 읽어야 한다. 존 웨슬리는 말했다. ‘책을 읽는 그리스도인만이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사명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를 분명히 알았다면, 서로가 말해주고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능 우리의 역할이면서 의무고 목적이다. 곧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자신을 위해서도 읽어야 하고 이를 가지고 주를 위하여도 권면해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불, 어떤 역경, 뜻하지 않은 어려움 앞에서 그의 본심이 드러나는데,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것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니기를(막 14:51-52). 나야말로 평온할 때와 다급할 때의 괴리감으로 정나미가 떨어질 때가 많다. 좋을 때야 누군들 인자하고 온화하지 못하겠나? 정작 ‘그 날이 공적을 살피리니’ 나는 나의 모습이 발가벗고 도망질하는 청년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 면목이 없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헛된 모습 속에 걸어 다니는 것일까?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인생이 허망한 까닭은 그 끝을 장담할 수 없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론 내 입만 살았고 생각만 분주한 게 아닌가, 두려울 때가 있다. 과다하게 부여된 앎으로 머리와 혀만 분주하고 실제의 모습은 ‘그 날이 공적을 살필 때’는 그나마 두르고 있던 홑이불마저 벗어던지고 도망치는 자는 아닐까?
이를 어찌 감당할까? 나는 무거운 마음이었고, 그럼에도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다가 다시금 ‘하나님은 나로 인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신다.’는 정의 앞에 안도하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를 본문으로 준비하고 있는 시편 44편에서는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1).” 읽고 듣고 아는 것으로 주께 아뢰고 있었다. 곧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아, 이와 같은 사실이 아니면 무엇으로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이를 우리 자식들에게 가르칠 의무가 있다. 알게 해야 한다.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출 10:2).” 이는 사명이고 완수해야 할 과제이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욜 1:3).”
시인은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곧 우리가 이룬 게 아니고, 우리로 구원함은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음이다. 왜?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신 까닭이다. 다른 이유나 공적이 없다. 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지, 우리로 주의 자녀를 삼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그리하여 나를 버리지 않으실 하나님의 사랑,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이를 바로 알 때, 본문의 결연함은 우리의 소망이 된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44:6).” 자신의 활이나 칼로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은 없다. 번번이 또 지고, 지고나면 환멸뿐이다.
주의 사랑은 그런 나의 기질을 잘 아심으로 환난도 의도적이시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9).” 어떻게 그러실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의아한 때도 있지만, 그 목적은 분명하셨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10).” 곧 주께서 우리로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려고 하심이다. 혹시 몰라 저들 곁에서 곁불을 쬐던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신다. 그래서도 도우신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46:5).” 우리를 버려두신 것 같지만 아주 버리신 적은 없다. 이를 알 때 시편은 우리의 환경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44:17).” 오히려 지혜자는 힘을 내라고 한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 24:10).” 우리 마음이 위축되고 걸음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겠으나,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시 44:18).”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의도적인 고난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19).” 주께서 그리하셨다면 주께서 그냥 놓아두지 않으실 것이다.
이를 시인은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21).” 주께서 다 아신다! 그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121:4).” 이는 곧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성경은 이미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 낮아지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높이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주만 바라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그리하여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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