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전봉석 2021. 2. 9. 05:5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가복음 13:28-29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편 111:1

 

 

어느 때보다 자아 충만의 시대다.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를 향한 예배의 시대다. 기분을 좋게 하는 찬양과 마음에 드는 예배 분위기와 자기 위로가 충분한 말씀을 선호한다. 나는 오늘 말씀을 그렇게 읽는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 13:28-29).” 무화과나무의 풍성함을 자아실현의 풍성함으로 놓고 생각해본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 자기애가 충만하여 개인의 취향과 기호와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우선하는 시대이다. 더는 하나님의 충만한 그 충만하심으로 만족할 수 없다. 찬양은 우리의 기분, 상태, 느낌 등을 반영하는 애절한 사연으로 가사를 채우고, 멜로디는 감미로울 따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노래는 고리타분하고 너무 엄숙하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도 누가 어떤 일에 극적으로 반전을 이뤘는지, 인생역전을 놀라운 은혜와 기적으로 둔갑시켜 들려준다. 예화가 본문을 잠식하였고 비유가 그 의미를 초과하였다.

 

엄연히 이에 따른 경고의 말씀이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 다만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그때가 머지않았음을 감지한다. 그때에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3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37).” 나는 오늘 말씀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 존중되는 시대를 연상하였고,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악랄하고 집요한 유혹이 자기애라는 생각을 해본다. 성경은 이를 반격하신다. 모든 만물은 엄연히 ‘그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를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셨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다시 말하면 만물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음 받았고 그리스도를 위한 존재가치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속, 유지될 뿐이다. 이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런데 어떤가? 우리의 기분과 취향에 따라 교회의 외형을 꾸미는 것은 물론 찬양도 말씀도 사람들의 선호와 그 기준을 반영하여 최대한 저들의 편의에 따라 각색되었다. 하나님 외에 거룩하신 이가 없는데 우리는 서슴지 않고 사람에게 성호를 긋는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다 하신 다윗도 그저 한 조각의 모형이고 퍼즐일 뿐이다. 위대한 사도들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마리아나 저들 모두는 조각이고 한 부분에 불과하다. 저들 이름으로 우리가 구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일명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그림으로 또는 조각이나 형상으로 새겨져서 그 위엄을 달리한다. 그 앞에 절을 하고 숭상한다. 그러나 아무리 저들이 우리보다 백 배 천 배 훌륭했다고 해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저들의 어떤 선행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다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오직 우리에게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저들은 무성하였던 ‘무화과나무의 비유’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때가 가까운’ 때를 살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붙들리게 된 이유다. 저마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그리스도라 한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막 13:21).” 교회마다 경쟁하듯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선동한다. 누가 어떤 일로 축복 받았다는 소리에 환호하고, 보다 극적이고 자극적인 누구의 사연으로 설교는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는 ‘다 아는, 지겨운 이야기’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내 문제, 우리 이야기로 가득 채워지는 서로의 관심은 우리를 비추는 빛을 가릴 뿐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는 곧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예수님은 안타까움으로 우리에게 물으신다. 이미 그의 안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그런데 우리는 그게 보화인 줄 알지 못한다. 개인의 취향이 다른 것이다. 각자가 선호하는 인생이 있는 것이다.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띤다. ‘자기 좋을 대로의 신앙’이 저가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환상적인 믿음으로, 믿음도 기호에 따라 자기 성향에 맞는 것으로 골라잡게 하였다.

 

과연 그가 나의 전부이신가? 오늘 본문은 그리 경고하시는 듯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막 13:5).” 정말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6).” 그러니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면서는 정작 하나님의 말에는 ‘고리타분하고, 다 아는 이야기’로 치부해버린다. 어느 교회, 목사의 화려한 이력이나 남다른 경험이 우리의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모세나 다윗의 지도력과 베드로와 요한의 남다른 체험과 바울의 화려한 언변에 끌려, 마치 한 조각 퍼즐을 쥐고 전체 그림을 상상하고 희구려든다. 한데 정작 저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죽이고 조금도 그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되었다(빌 3:3). 그런데 다들 조각조각 모아진 것을 들고 파당을 짓고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한다. 이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막 13:7).”

 

부디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18).” 제 몸 하나 건사하느라 여념이 없는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도망해야 한다(14). 하던 일에 연연하지 말고, 미련을 두어 미적거리지 말아야 한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5-16).” 아,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17).” 자신들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느라 정작 때를 놓칠 수도 있다. 이를 지혜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곧 우리의 지나친 자기 소욕이 정작 우리를 삼킬 수가 있다.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막 13:19).” 내가 선 오늘이 그 날이다. 오늘을 사는 지금이 그때이다.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과 동시에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보다 나은 시절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는 완성된 그림을 본다. 조각과 부분으로 알고 더듬으며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막 13:23).” 이보다 더 완전한 때가 어디 있었나? 우리에게는 완결된 성경이 있다.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있다. 서점에 가면 누구라도 살 수 있고, 미국의 싸구려 모텔에도 성경이 비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어느 때보다 어두운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 온통 자기애로 충만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하시는 말씀은 교묘한 사탄의 연막으로 자기애가 충천한 시절로 바꾸어놓았다. 누가 뭐라든지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헌법으로도 명시되어 세상이 보호하는 값진 보물이 되었다. 자신을 회고하고 자아를 충족시키는 사업이 성공한다. 그렇게 몸을 관리하고 기호를 선택하며 성적취향도 개별적인 영역이 되었다. 섣불리 동성애에 대한 의견을 냈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아가 우리의 저주가 되었다.’고 하였다. 죄의 결실로 가장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었다. 자기계발이 그 어느 때보다 상품성이 높고, 자기관리가 여러 모양으로 파생하며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우리 교회 건물에도 미용과 관련된 업종이 한 층마다 서너 개씩은 입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의 충만하심으로는 가치 충만이 어려운 시절이다. 조금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의 기분과 감성을 자극하는 ‘복음송가’들이 인기를 끈다. 찬양하던 이가 대중가요도 병행한다. 가사는 노곤하여 여느 멜로 영상에 삽입해도 손색이 없다. 대중이 감동하듯 예배에도 그 감성은 우리의 영혼을 이끈다. 눈물이 찡, 하고 마음이 울컥, 하면 은혜라고 여긴다. 크게 외치고 열광하며 부르짖음으로 카타르시스에 젖고 이를 성령 충만으로 둔갑시킨다. 그런 거 보면 사탄의 교묘함은 절묘하기까지 하다. 그게 그건 것 같고, 그렇게 한 번 흥에 겨워 눈물을 훔치면서 은혜 받았다고 여기면 되는 것으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 13:28-29).” 이와 같은 때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

 

현실적인 문제, 나의 감정, 기분, 느낌에 이끌리는 모든 것이 어느 때보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무성해진 것을 본다.’ 때가 가까움이다. 내가 자꾸 나에게 이끌릴 때, 나의 문제로 씨름할 때, 내 기분과 내 상태에 너무 예민하여져 그에 따른 돌파구로주를 바라는 모든 것은 허상이다. ‘주님이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세례요한의 이 말을 바울의 음성으로 다시 들으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때에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6).” 나는 오늘 말씀 앞에서 엄숙해진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37).” 깨어 있는 자가 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0).” 이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1).”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이 나로 주를 온전히 바라게 하였다.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1).” 부디 그러하고 그러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