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전봉석 2021. 2. 12. 05:57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가복음 16:16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편 114:7-8

 

 

이것저것 구하는 게 많은 사람의 신앙은 늘 허기지다. 채워도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 영혼의 허기는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데만 정신이 팔린다. 자신에게 너무 예민한 자의 신앙은 주를 흥하시게 하는 데 소홀하다. 자주 자존심이 상하고 남의 일에 동요된다. 상처가 많은데 그걸 후벼 거듭 생채기를 낸다. 그리고 늘 상처 받을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별 거 아닌 일에도 예민해지는 것이다. 요즘 자주 이와 같은 사실을 되새기고 거듭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우리의 씨름은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가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설 인사로 한 것인데, 잠시 나눈 안부에서 그 내용은 같았다. 하던 일은 벌써 그만두었고, 도로 집에 처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떤지? 여전히 약은 먹는지? 하고 몇 마디 더 묻다 그만두었다. 저에 대한 나의 마음도 아무리 애써도 부질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는 다른 방도가 없다. 잘해준다고 될 일도 아니다.

 

예수 부활하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오늘 말씀은 누가 믿든 말든 사실을 기록한다. 이를 다독여 이른다고 설득될 게 아니다. 마음에 두어 주가 하신 일을 본다. 믿음이란 그게 보이는 것이다. 복음과 빛은 가릴 수 없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저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 그 마음을 다스리는 자신을 믿는다. 다소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그리 알고 사는 일이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이루어진 것으로 사는 게 믿음이다. 소망이란 그런 것이지 다 된 밥을 소망할 필요는 없다. 복음이 그 마음에 가리어진 것은 내가 어찌 다독여서 설득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저는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있을 뿐이다. 마음이 어려워졌다.

 

설 연휴에도 나는 동일한 동선을 따라 하루를 시작하고 점심을 보냈다. 특히 새벽에 일어나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아침 일찍 교회로 나가 그 안에 머무는 시간이 좋다. 설교원고를 작성하였고, 누구와 통화를 하였다. 누구와의 통화냐에 따라 마음은 저 혼자 힘들어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저 오가는 사는 일에 대해서는 싱거운 마음뿐이다. 언제 그렇게 마음을 두고 있었던가? 새삼 묻고 묻지도 않은 말이 오갈 때면 속이 메슥거릴 때도 있다. 빈말이란 공허한 무덤 같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안부를 묻거나 인사치레로 오가는 말들을 가급적 피한다. 평소 말 한 마디 섞지 않아도 살만한 사이에 대하여는 굳이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 되었다. 전에 같으면 내가 먼저 뭐라도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것이 나의 위로가 아니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육신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를 앎으로 더는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의 능력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그러므로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시는 말씀을 떠올린다(고후 10:3-6).

 

그러니까 내가 애써 뭘 하던 시절의 애착은 헛되었다. 통화를 하게 된 누구와도 그저 일상적인 말로 안부가 오가고 그게 전부였다. 서로가 돌아서면 또 금세 관심도 없는 말들이었다. 정작 속엣 이야기를 나누며 산다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그것으로 위로가 되고 도움을 주고받는 것 같지만 잠깐 묵은 시간은 그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데 시선을 두게 한다. 가끔은 그립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감상에 젖어버리곤 하지만 그러는 말이나 생각은 모두 헛되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나의 말과 지혜로 덤빌 때는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서도 그리하여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결국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그의 능력으로 하여야 한다. 믿음이란 게 나의 이해나 상식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마음을 어찌 할 수 없다. 내가 나의 마음도 주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신다.

 

유난히 정을 주고 마음을 두었던 아이부터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실망은 어김없다. 하나 같이 내 맘 같지 않은 것이다. 전에는 이 때문에도 헉헉거렸는데 더는 그것마저 ‘내가 나로 예민했던 일’임을 깨달았다. 내 문제가 아니다. 다 이긴 싸움을 계속 이겨보겠다고 설치는 꼴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요즘 나의 기도는 다만 이러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주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내가 애쓰지 않음으로 애쓰는 시간보다 유익하고, 내가 기를 쓰며 잘하려하지 않음으로 잘하려 하던 시간보다 보람 있는 길을 알았다. 오직 주를 의뢰한다는 것,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싫든 좋든 냄새가 나게 돼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처럼 누가 감당하겠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시는 말씀의 과정을 묵상하게 된다(15-17).

 

그런 점에서도 나는 나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 신중한다. 때로는 나의 몸의 상태나 감정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몸이 좀 안 좋다고, 마음이 좀 어렵다고, 설 연휴여서 한 번 틀어지고 늘어지면 그때마다 이상하게 그게 더 낯설다. 누가 뭐라 하든 이제는 있어야 할 자리를 바로 알고 해야 할 일을 무던히 행하는 것이 연단이고 수련이었다. 스스로 만족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나는 이제 이 말씀만 붙든다. 내가 만족하려 들면, 모르겠다! 다들 괜찮은 척 하는 것인지 정말 괜찮은 것인지, 나는 더 이상 허기를 느끼며 살고 싶지 않다. 안 그래도 되는 삶을 두고 너무들 애쓴다. 이는 누가 누구를 갈급하고 무엇으로 위로를 삼으려 하는데 이게 마치 막대사탕 같은 정도라! 물고 있으면 달콤한 것 같은데 입에서 빼면 여운뿐이다. 누구와 모처럼 카톡을 하고도 전에처럼 마음이 오래 요동하지 않아서 신기하였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부 사랑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전하고 권하되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막 6:11).” 미련도 자기연민이라, 공연히 붙들려서 끌려 다닐 게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누구에게 ‘크게 존재감이 없어요.’ 하는 말까지 들어가면서도 마음을 주는 것이 사명인 줄 알았다. 때론 성가시다는 말투로, 또는 한참 동안 문자에 답도 없는 것을 기다리면서… 그러느니 주를 바라자. 저가 마음에 걸리면 주께 아뢰고, 더는 마음에 큰 무거움이 없다면 평안함으로. 미련은 나의 어떤 자만보다 끈질긴 자가당착이었다. 하나님은 기어이 하나님이시었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나님은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오늘도 돌멩이에서 못물이 터지기를 바라고, 차돌에서 샘물이 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 그 모든 일을 행하셨고 주관하시는 이를 아는 것,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못물이 터지고 샘물이 나는 일보다 백배 더 유익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닌 하나님을! 이러한 마음에서 나타나는 일상은 놀라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정작 능력이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주인, 주체를 바로 아는 것이었다. 빈 무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그럴 때 대부분은 그 자리에 연연하고 흔적을 더듬어 상징화하고 숭배하려 든다. 왜 그 모든 흔적을 없애시고 남기시지 않았는지 이제는 알겠다. 그 무덤이 뭐? 저가 지신 십자가가 뭐? 정작 그것들은 소품에 불과하고 주체는 따로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1).” 그러니 오늘 날에도 뭐가 발견되었다 하면 졸지에 성지가 되고 성물이 된다. 본질은 간 데 없고 모형만 붙들고 숭배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 중요한 사실은 이것뿐이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19).”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여기 반석에서 못물이 터졌다 저기에서 샘물이 났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헛것을 붙들듯 누구를 사랑할 수는 없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