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4편 /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전봉석 2021. 2. 12. 09:05

20210214 주일

 

시편 44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들어가는 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지난 주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는 시편 43편의 말씀으로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때론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처한다 해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이처럼 시인은 자신을 화자로 두고 객관화함으로 자신에게 너무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곧 우린 너무 우리 자아에 몰입한다. 주관적으로 살아간다. 온통 현실적인 문제와 자아실현에 초점을 맞춰 산다. 구원도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 게 아님을,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즉 우리의 기분과 감정과 느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게 힘이다. 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주의 ‘충만한 데서’ 사는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이 마땅하다.

 

오늘 시편 44편에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자아를 숭배하며 사는 이 시대에 던지시는 교훈을 듣게 된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헌법으로 규정하고 우선하는 이때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하시는 말씀에 굴복하게 된다. 이 온 우주만물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음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저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존재하고 유지 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오늘 시편의 내용을 함축하는 말씀을 먼저 언급하였다.

 

 

본문 이해

 

오늘 시편은 민족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민족애가’다. 150편의 시 가운데 여섯 편이 그리 분류된다(44, 47, 60, 74, 80, 90). 하지만 슬픔은 개인의 것이나 국가의 것이 따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싫든 좋든 어디에 속한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수시로 공격당했다. 그러다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수난을 겪는다. 그에 앞서 모압과 암몬의 군사적 위협도 끊이지 않았다(대하 20:4-13). 오늘 시편의 정황은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침공하여 유다를 초토화하고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의 상황에서 지은 시이다(왕하 18:13-19:37).

 

우리는 이럴 때 당혹스럽다. 주의 약속과 현실이 이율배반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어려움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우리의 바람과 별개다. 성경의 목적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 우리의 의지가 주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사복음서의 중심 내용도 그리스도밖에 다른 주가 없음을 일깨운다. 오늘 우리가 은혜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보다 훨씬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등도 하나하나 조각에 불과하다. 저들은 불투명한 길을 더듬으며 갔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이 완성된 시대를 산다. 저들보다 ‘넘치는 하나님의 기쁨’과 ‘그의 충만하심’이 함께 하시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밝혀준다.

 

1. 우리 조상들의 날을 우리는 우리의 귀로 듣는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시편 44:1).”

 

여기서 ‘조상들의 날’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울 같다.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은 하나님의 공적을 일컫는다. 오늘에도 구현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를 우리가 ‘우리 귀’로 듣는다. 아무나에게 열린 말씀이 아니다. 곧 우리의 믿음은 이와 같이 우리 귀로 듣는 들음에서 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성경이 누구에게는 성서(聖書)로 비춰져 단지 눈으로 보는 책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를 귀로 듣는 성경(聖經)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힌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남다른 자격으로 발탁된 것이 아니다. 저들을 의롭다 하신 이의 의로움으로 의인이라 부르셨다. 이를 오늘 ‘우리가 우리 귀로 듣는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즉 같은 내용으로 저들을 기뻐하심과 같이 우리도 만민 중에 택하셨고 기뻐하신다. 이에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출 10:2).” 이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상식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애굽은 세상이고, 세상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계다. 저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심은 우리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끌어내심이다.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계보로 이어진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욜 1:3).”

 

2. 구원은 주의 것이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구원은 우리를 위한, 우리에 의한, 우리의 결실이 아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도 없다. 구원은 오롯이 주께서 기뻐하신 일이다. 이는 우리로 기뻐하신 그 즐거움에서 기인한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즉 앞서 스바냐와 같이 사무엘도 같은 목소리를 낸다. 하나님이 우리로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그렇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이것이 오늘 시편의 핵심이고 성경의 주제다. 우리 구원의 비밀은 하나님의 감추실 수 없는 즐거움이다. 시인은 이를 ‘조상들의 날’에서 우리가 ‘우리 귀’로 들어서 안다고 하였다. 이를 체험하고 고백하는 삶이 ‘조상들의 날’ 뒤에 이어지는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의 날이다. 그래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여기서 ‘내 칼’은 자기 의지, 자기 노력,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자신의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한 하나님의 충만한 데에 이르지 못한다. ‘자신의 활이나 칼’은 남다른 자부심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는 재물이고 재능이며, 누구에게는 저가 ‘믿는 구석’이다. 스스로 믿는, 충분하다고 여기는 게 있는 한 ‘조상들의 날’에서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복음은 없다. 그저 남의 이야기다.

 

3.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우리로 알게 하신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시 44:8-9).”

 

앞뒤가 안 맞는 말씀 같다. 우리가 종일 주를 자랑하고 감사하는데, 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는 것일까? 8절과 9절만 보면 서로 대치되는 구절 같다. ‘그러나’는 분명히 앞뒤 내용이 상반될 때 쓰이는 접속 부사다. 기껏 자랑하고 감사하다,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는 게 주제가 아니라, 10절에 이어지는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하는 고백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와 우리가 같이 하지 않게 하시려고, 저들은 탈취하고 빼앗으며 사는 자들이다. 종종 우리가 사는 사회를 ‘정글’이니 ‘전쟁터’라 비유한다. 먹고 먹히는, 빼앗기지 않으려면 빼앗아야 하는 삶의 정글 같아서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와 같은 자들과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곧 우리가 오늘 당하는 어려움은 ‘징계’다. 가벼운 꾸지람이고 회초리다. 이는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는 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고, 이를 잃지 않게 하시려고 자기 몸에 병마(病魔)를 두셨다고 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곧 우리의 가난이나 질병, 남들만 못한 모자람이 세상에서는 결격 사유가 되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로 ‘은혜 위에 은혜’에 머물게 하신다. 왜? ‘우리가 받은 계시’가 크다. 우리 귀로 들은 ‘조상들의 날’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귀하다. 이율배반적인 것 같은 날의 목적이다.

 

‘양반은 추워도 곁불을 쬐지 않고, 군자는 종종걸음을 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운동선수도 기량을 잃지 않으려 모든 것을 절제하고 달음질한다. 하다못해 인생을 깨달은 이들도 군자니 양반이니 하며 자신을 지키고, 운동선수도 자신을 관리하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이 ‘주께서 우리로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려는’ 은혜임을 명심할 때,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46:5).” 하는 다른 시편의 고백과 같은 목소리를 낸다.

 

 

나오는 말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시 44:17).”

 

우리는 결코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도 세상을 동경하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한다(18). 그럴 수가 없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19).” 그러할 때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알고, 이를 아는 우리를 하나님도 아신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21).” 아무리 어려워도, 원망하고 좌절하고 심지어 또 실패할지언정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신다. 어떻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121:4).” 결코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인생 긴 여정도 조만간 끝날 것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우리의 죽음조차 ‘주의 죽은 자들’의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소리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곧 왜 우리가 오늘을 감당하게 사는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 우리에게 ‘조상들의 날’을 ‘우리 귀로’ 듣게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이는 아브라함의 날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이를 오늘 시인은 들었고, 자기 입으로 들려주며 고백한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