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2편 /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길

전봉석 2021. 1. 29. 14:06

20200131 주일

 

시편 42편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길

 

 

들어가는 말

새로운 일을 앞두면 두려움이 먼저 온다. 내일은 항상 염려를 시작으로 열린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그러나 이게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나?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실과 개별적인 체험으로 지표를 열어주신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정은 시온을 향한 우리의 인생여정에서 예표다.

 

출애굽 후 저들은 바란 광야에 다다랐다(민수기 13장).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염려와 불안이 엄습했다. 저들은 정탐꾼을 보내기로 한다. 매우 합리적이고 합당한 결정 같다. 그러나 이보다 황당한 판단도 없다. 약속의 땅은 앞서 500여 년 전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한 땅이다. 더욱이 이를 위해 저들은 출애굽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신 1:22).”고 결정한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선물을 뜯어보고서 갖든지 말든지 결정하자는 것과 같다.

 

정탐을 하고 돌아온 12명 가운데 10명이나 부정적인 보고를 한다. 그로 인해 저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결국 40년의 광야생활에서 당시 성인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 모래 위에서 죽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듯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저들은 하나님의 통치보다 사람을 왕으로 세워 통치하기를 바랐다. 당시 사무엘은 비통히 여겼으나 하나님은 그리하도록 놓아두셨다! 종종 우리는 기도응답을 오해한다. 싫어하면 그냥 두신다! 헛되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 결과는 오롯이 살아서 감내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 앞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역사적인 사실을 먼저 언급한 것은 오늘 우리가 나눌 42편의 시는 여덟 편의 ‘시온 시’로 분류되는 첫 번째 시편이다(42, 43, 87,121, 122, 125, 126, 129편). 시온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우리가 들어갈 본향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 42편과 43편은 시온을 떠나 있는 우리의 온갖 수모를 통해 소망해야 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앞서 모세의 증거를 다시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행하셨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둘째, 우리를 안으시고 여기까지 오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

 

셋째,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가는 길을 지도하신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길

 

1. 우리 영혼은 시온을 그리워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고향의 의미가 그렇듯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우리 영혼의 소망이다. 이는 탕자의 비유를 연상케 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예수님도 일깨우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우리에게는 ‘약속의 땅’이 있다.

 

2. 우리는 타는 목마름으로 주의 얼굴을 찾는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은 주의 자녀로서 당연하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결국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하는 말씀을 붙들고,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하시는 말씀 앞에서 가는 길을 주저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때론 이 길이 맞나? 싶다.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우리를 공격하는 게 타당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적당히 믿어! 남들도 다 그래! 할 때에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37:28).” 하시는 말씀이 우리로 시온을 향해 가는 걸음을 재촉하신다.

 

4. 오늘날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갈 수 있는 것은 복이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 42:4).”

 

복에 겨워 예배를 저버린다. 감사한 줄 모르면 언제든 교회를 등진다. 왜냐하면 세상의 이치와 현상이 훨씬 그럴듯하다. 특별히 나아지는 것도 없는 것 같고, 해서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2-33).”

 

5. 시온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는 절망조차 찬송이 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옛날이 더 좋았다며 오늘을 푸념하는 경우가 있다.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주 원망하였다. 그럴 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2-13).” 결국 우리의 한계는 자기기만이다.

 

6. 시온을 향해 나아갈 때 고난은 은혜를 상기시킨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시 46:6).”

 

우리 본질이 참 희한한 것 같다. 좋을 땐 모른다. 탕자처럼 돈 떨어지고 친구들이 떠나고 굶주려야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떠올린다. 사람 근성이 그렇다. 어릴 땐 자신이 혼자 큰 줄 안다. 그러다 성장하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7. 우리는 시온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한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시 42:7).”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운데 괜한 것은 없다. 오늘의 어려운 현실을 보며 자신을 근신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8. 낮에는 은혜를 생각하고, 밤에는 주를 찬송한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이는 성경의 가장 기본 원리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결국 주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9.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면 괴로워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시 42:9-10).”

 

모 선교단체니 무슨 전도협회니 하는 비인가 단체들에서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재 확산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자주 도마 위에 오른다. 봉사활동과 해외연수가 진학과 취업에 있어 필요한 스펙이 되면서, 교회마다 ‘선교여행’이 무슨 패키지처럼 행해지고 이를 사업적으로 악용하는 단체들도 늘었다. 아!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우리는 이를 통감하고 자중해야 한다.

 

10. 우리는 시온을 향해 가는 가면서 찬송하는 사람들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11).”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안위와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관계를 정략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필요와 목적으로, 저의 도우심과 긍휼하심만을 추구한다면 문제가 있다. 사랑의 참된 기쁨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나오는 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오늘 우리는 시온을 향해 나아간다. 저마다 죽음에 다다르기까지, 시온을 앞에 두고 바란 광야에서 주저하던 이스라엘처럼 허다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길로 간다. 그러나 우리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이와 같은 선명한 말씀 앞에 주저하지 않는다. 곧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는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의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시온을 향해 가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며 기쁨으로 나아간다. 때로는 두렵고 떨리지만 우리는 결코 낙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