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7 주일
시편 43편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들어가는 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곧 목이 베이기 전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예수로 인해 자신들이 위축되는 것을 말하였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 그러자 요한이 말했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7).” 또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곧 ‘자신은 그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하였다. 이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 하는, 우리 신앙의 놀라운 이정표를 남겼다.
저마다 자신이 흥하려고 교회를 다닌다. 요구하는 게 많고 바라는 게 끊임없다. 마치 어린아이 같이 요구하는 게 많고, 원하는 것을 받으면 그게 전부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우리가 맡은 것이 말씀인 것을 안다. 곧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1:4).” 그 특징은, 첫째, 맡은 것에 충성한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 기본적으로 말씀을 맡았고 이를 나타내는 데 있어 각자의 달란트가 다르다. 둘째, 남의 판단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3).” 누가 무슨 역할을 하든지 각자의 소임을 다함으로 충성한다. 셋째, 스스로 자책하지 않는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이는 교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였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흥하시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쇠하여야 하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쇠하여짐이 하나님을 어떻게 흥하시게 하는지를 찬송하는 시이다. 이 시는 두 연으로 나누어 첫 번째 연(1-3절)에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를 바라고, 두 번째 연(4-5절)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만이 가치 있음을 살피었다.
1연.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1. 하나님이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
이를 위해 우리의 분별력이 살아있어야 한다. 우리는 남의 판단을 받지 않으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3).” 이를 위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 다만 경건하지 않은 나라에서 송사하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를 멀리해야 한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이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그렇다면 우리의 구할 것은 분별력이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25:26).” 지혜자의 역설은 우리로 하나님만 바람으로 당당할 것을 강조한다.
2.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주를 신뢰함으로 극복한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2).”
나름 한다고 하는데 결과가 엉뚱하고 억울하다. 인생은 본래 죄의 결과로 얻은 땀과 피로 얼룩진 것이다. 그러할 때 욥은 고백하였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저는 순식간에 열 자녀가 죽고 모든 재산을 잃었다. 건강이 상했고 아내는 배신하여 떠났다. 그럼에도 저와 같은 고백이 가능한 것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온전히 주를 신뢰함으로 가능하였다.
3. 주께서 빛과 진리에 이끄신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이 모든 상황에서도 우리로 굳건하게 하심은 주의 거룩이다. ‘주께서 계시는 곳’ 바로 그 시온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우리의 삶은 남다르다. 곧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아무리 저마다의 개성과 개인적인 판단이 이 시대를 좌지우지한다 해도, 우리는 오로지 ‘범사에 주를 인정하자.’ 이 명철이 우리로 주의 길을 가게 하신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 5:2).” 이와 같은 기도나 소망이 어찌 모든 사람의 것이겠나? 분명한 것은 우리로 바라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주께서 우리를 빛과 진리로 이끄실 것이다.
2연.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4-5)
1. 우리에게는 예배에 대한 갈망함이 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
예배는 주를 바라고 구하고 사모하는 자리다. 함께 함으로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곳이다. 비록 지금의 처지가 여의치 않고, 때론 그 어려움으로 쩔쩔맨다 해도 우리는 분명히 확신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 지으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고로 우리를 방치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이러한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다. 곧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오늘을 더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설레고 감복하는 게 맞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그렇게 우리는 거룩한 주의 자녀들로 주의 나라에서 주를 경외함으로 예배할 것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2.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어떨 때 낙심이올까? 내가 원하고 바라던 것이 아닐 때, 나의 바람은 나로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도 한다. 어떨 때 불안해할까? 지레 짐작 나의 생각으로 의도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염려와 근심은 순간 우리를 쥐고 흔든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정의는 우리로 굳건하게 한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일까? 스스로 애써 이루어놓은 성과가 많음으로? 그것으로 상급을 받을 것이어서? 아니다! 하나님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러므로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나오는 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우리는 한 번 은혜를 받고 마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 중생한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면 더는 주의 충만하심에 거할 수 없다. 우리의 은혜는 그의 충만하심에서 나온다. 그런데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한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 할 수는 없다. 저는 누구신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곧 주의 충만하심은 한이 없으시다. 그의 사랑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거한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고 엄청나다 해도,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더욱 더 충만하심으로 용서하지 못하실 게 없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스스로 좀 했다, 이루었다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저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것이다. 마치 허세와 과장은 열등의식의 산물인 것처럼, 자신이 눈 먼 것을 알지 못하면 자신의 벌거벗음도 알 수가 없다.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스스로의 자만과 허영으로 수치심조차 잃은 영혼은 구제불능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면서 저들은 자신들이 충분했다고 여겼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예화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
이에 바울 사도는 엄히 경고하였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의 자만이 우리로 그 영혼을 해하게 하지 않으시려고, 오늘 1연 2절의 내용처럼 우리로 고통도 허용하신다. 이를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은혜 위에 은혜로 ‘가시’라 표현하였다. 즉 자신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그것이 육신의 질병일지, 실패와 좌절일지, 난데없는 고통일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무궁하시다>고 하였고,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사도 요한은 <끝까지 함께 하시는 사랑>이라 하였고,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바울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 사랑, 그의 충만하심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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