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4:34-35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편 126:3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경우들이 있다. 교회는 다니는데 말씀과는 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각자의 하나님을 섬기느라 여념이 없다.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한데 성경은 급박하게 우리를 붙들어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자칫 유념하지 않으면 우리도 들은 것을 흘러 떠내려가게 할 수 있다. 사느라 사는 데 정신이 팔려 맡기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3).” 등한히 여기고 어기적거리다 자아도취에 젖어 그 신앙은 맹탕이 될 수 있다. 그런 우리를 베드로 사도가 다급하게 불러 세운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40).” 바울 사도도 우리가 거하는 아덴을 향해 외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0-31).”
곧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4).” 이를 가만히 묵상할 때 오늘 아침의 아침이 긴박하게 들려온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 14:34-35).” 이는결국 들은 바 이 복음을 등한히 여기다가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다. 곁에서 보면 대부분이 교회를 다닌다. 상가나 가정에 십자가를 걸어두고 성경구절을 액자에 담아 둔 곳도 많다. 한데 그 내용이 온통 복을 비는 것으로, 정작 긴박한 주님의 목소리는 드문 것 같다. 마태는 서술하고 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누가도 이를 알린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 예수님은 그때마다 외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14:35).” 이는 들을 귀가 막힌 세대에게 하시는 경고다. 들은 바 그 말씀을 등한히 여기는 우리에게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34-35).”
늘 같은 날의 연속인 것 같은데도 뚝딱, 하면 한 주가 흘렀다. 언제는 한없이 기분이 까부라지고 언제는 몸이 아파 쩔쩔매다가 그러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시간은 흐른다. 저마다 빌고 바라고 의지한다고 하며 주를 섬기는 것 같지만 자신들의 필요에 따른 신앙일 때가 흔하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점검해야 한다.’ 단지 미신적인 마음으로 십자가를 걸고, 좋은 성구를 읊조리는 것으로 그 맛을 온전히 내고 사는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어째서 바울은 이와 같은 결연함을 다진 것일까? 저이 정도면 이제 좀 됐다 싶고, 다 도착한 것처럼 굴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무엇이 저로 떨게 하고 약하게 하고 두렵게 하였을까?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 믿음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다. 저마다 믿는다고는 하나 그 믿음이 전부는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선한 삶과 보람 있는 날을 기대하며 신앙을 붙든 사람들도 있다. 위로를 얻고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의 종교인도 있다. 곧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을 꿈꾸고 실현하는 데 복음을 양념처럼 간을 더하며 사는 것이다.
과연 이 길은 나의 유일한 길인가?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를 안다면 나의 남은 날은 무엇에 전념하는 것이 맞겠나? 하다못해 누구는 정년퇴임 후 남은 노년을 무엇을 위해 살까, 하여 꽤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모색하고 있다. 그 나이에도 여러 학원을 다니고, 어디 여행 갈 곳을 계획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생각으로 한껏 부풀었다. 그런 정도의 삶이었다면, 바울은 이처럼 간절하게 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모두가 알지 못한 그것,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이는 마치 수수께끼 같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바란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종종 나는 누구에게 ‘가만히 있는 연습’을 권한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리 분주하여 성경 한 장 읽을 수 없고 잠시라도 주를 바라며 기도할 수조차 없는 저에게, 덧없고 무상한 삶에 대하여 말한들. 다시 히브리서 기자의 간곡한 목소리로 들으면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흘려버리기 십상이다. 믿는다 하고,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고, 심지어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 확신하면서도 무엇이 다른지? 과연 내 가슴을 채우고 있는 기쁨은 무엇인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우리 배가 신이어서 다들 자기 배 채우느라 정신이 없는 것을 역으로 주님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야 정상인 것을 일깨우신다. 그럴 수 있는 자는 우선 목마름을 아는 자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그 영혼에 아쉬울 게 없는 자는 바울의 긴박함도 그의 결연한 다짐도 크게 와 닿지가 않는다. 곧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하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 주님은 우리를 위해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세상은 받을 수 없고 우리로는 거하게 하시니, 우리 속에 계심이다. 그 증거는 오늘 본문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눅 14:17).” 사람들의 반응은 이상하다. 저들은 본래 믿는다고 하고 교회에도 다니고 누구보다 선을 구하고 위로하며 삶에 위안을 얻고 살던 자들이다. 한데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18).” 이 무슨 일일까? 그들의 우선이 다른 데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19).” 한 겨리면 두 마리씩 한 수레를 끌 수 있는 것이라, 다섯 겨리면 꽤 많은 투자를 했다. 당장은 이를 돌보고 시험하는 게 우선이었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20).” 그러게, 저마다 사연이 있고 어쩔 수 없는 이유들이 있는 법이다. 각기 자신들이 청함을 받은 것에 앞서 거두고 돌보아야 할 일이 우선하는 것이었다. 정작 자신이 지금 어떤 지경에 놓였는가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항구에 다 정박했다 여겼는데, 흘러 떠내려가는 중이다. 그 길은 여러 모양이라 다들 그런가 싶다. 가만 보면 이게 우리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여전히 굳은 마음으로 스스로가 단단하여서야 그 고집을 누가 이기겠나?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도무지 꺾일 것 같지 않던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이 드러나야 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사 35:1).” 이처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7).” 있을 수 없는 일이 우리 안에서부터 전복되고 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10).”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하염없이 되새기게 된다. 오늘 시편은 그렇게 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는 것 같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3).” 우리의 결국은 그러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 어기적거리고 느려 터졌다 해도 무던히 또 하루를 주의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더 좋은 위로가 무엇이겠나?
이는 곧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나로 생각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6-8).”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 그러므로 이를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그러니 남들 다 적당히 그만그만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청함을 미루고 거절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들로서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시는 보증을 얻었다(시 126:6). 이는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곧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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