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1-3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2
그래서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했을까? 또한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섰던 청년은 재산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는데, 이내 그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돌아와 주를 따랐을까? 종종 성경은 다음 이야기를 생략함으로 빈 여백으로 두신다. 탕자로 불리는 작은 아들도 그렇지만 큰 아들 역시 아버지가 먼저 찾아오셨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마찬가지로 “그가(큰 아들이)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8).” 말씀 앞에 가만히 서야 하는 여백에서는 누리고 느끼고 참여할 수 있는 공감이 넉넉하다. 오늘 본문에서는 큰 아들에게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내 것이로되’ 하신 부분에서 단서를 얻어, 나는 큰 아들 역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함께 즐거운 잔치에 들어갔을 것이라 짐작한다. 특히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하는 데서, ‘있었으니’ 하는 과거형도, ‘있을 것이니’ 하는 미래형도 아닌, ‘있으니’ 하는 현재형의 시제를 사용하셨다. 함께 있으면서 이를 누리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큰 아들의 심정은 멀리 떠나 있던 작은 아들의 것과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이 마음으로 우리의 은사를 생각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16).” 마땅히 할 수 있는 그것으로 족한 줄 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잔치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였던 큰 아들이나, 가진 게 많아 이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데 주저하며 돌아간 청년이나… 마땅히 여기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였다.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자기 열심이 있는 까닭이다. 이는 엄밀히 주가 주신 물을 마시지 못한 반증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어떠하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인데, 의기소침하고 우유부단하고 낙심하고 뭉그적거리며 맥 빠진 모습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만 때문이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 있다.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인할 수 없다. 적대감이다. 곧 자기가 한 일 때문이다. 불신앙이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하는! 실제 우리는 그것으로 시달린다. 우리 안에는 예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 판단, 이해, 수긍은 예수로 만족하고 자족하도록 맞춰졌다. 그런데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하시는 말씀 앞에서 어리둥절한 것이다. 그러니 다음 말씀이 와 닿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우리가 나름 애쓰고 수고하는 것은 헛되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노력하여 얻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 살았다. 율법 아래에 있었음으로 죽어라 하고 지키고 또 애써 그것으로 평가되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다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수고의 떡을 먹는 게 뭐 그리 감사하겠나? 내가 애쓴 결과일 뿐인데! 아버지 앞에 억울한 심정은 그런 것이었다. 나름 한다고 했던 열심을, 허랑방탕하다 돌아온 동생에게 빼앗기는 것 같다.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의 마음엔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서운하고 억울하기만 한 것이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그러니 저에게 은혜란 그저 수고하고 얻은 것으로 감사의 농도가 다르다. 전형적인 구약의 성도의 모습이다. 그들 안에는 주를 섬기는 목적이 달랐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간곡히 전하였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 차이를 바로 알면 늘 송구해하면서도 뻔뻔하지만 누림와 인식에 참여한다. 죄송함과 감사함이 공존한다. 우린 종교인이 아니다. 스스로 애써 무얼 추구하고 바라는 이가 종교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저 돌아온 둘째 아들의 마음과 같다. 면구스럽고 송구하나 감사함으로 찬송하고 즐길 뿐이다. 우리는 결코 큰 아들처럼 종교인도 도덕적인 인물로도 만족함을 누릴 수 없다. 물론 도덕적이야 하고 더 열심을 다해 충성하는 삶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 이유와 목적이 전혀 다른 것이다. 성령을 주신 목적은 이를 바꾸어놓으셨다. 단지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정도가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 14:5).” 성령이 아니면 이를 알 수 없다. 스스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다. 큰 아들은 기어이 아버지 집에 들어가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을 혼자 뭉개고 미적거리며 의기소침해 하고 우울해했을 수도! 사는 게 다들 고역인 것처럼 예수 믿는 게 힘에 부치는 사람도 있다. 밀린 숙제처럼 저의 신앙은 늘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기도도 성경도 감사도 찬송도 일이다.
누구와 통화를 할 때면 그의 맡은 사역이 늘 고되다. 교회 시스템의 문제를 운운하지만 정작 저의 안에는 사랑이 없다. 한 번도 잔치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 그냥 즐거울 수가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잔치가 되레 피곤하다. 마냥 즐거워하는 성도를 보면 무책임한 것 같다. 늘 철저하게 자신을 지키며 성실한 사람이다. 저의 눈에는 모든 게 못마땅하다. 큰 아들과 같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자기의 애쓰고 수고한 것만 보인다. 이를 몰라주는 하나님이 야박하다. 그래서도 자주 사역지를 바꾸게 되고 그럴 때면 늘 전에 있던 교회는 항상 문제가 많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거슬리는 것만 눈에 띈다. 불만이 가시지 않는다. 이는 사역에 필요한 자질이 없는 게 아니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저는 열심이고 헌신적이다. 인내하고 씨름하는 사역자다. 한데 그 마음이 단순하지가 않다. 열심히 한 만큼 변하지 않는 것 세상 탓이다. 내가 싸워야 하는 게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취향의 문제도 기질의 문제도 아니다. 저의 믿음의 문제다. 믿음을 오해하였다. 믿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하나님만 보고자 하는 순전함을 저는 알지 못한다. 은혜의 시대에 율법으로 사는 자이다.
새로 온 가정의 아이가 있다. 그 엄마는 지방에 내려가 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온다고 한다.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지, 아이는 어떻게 생활하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몰랐다. 아내는 가정 예배를 드리기 전에 마치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를 돌봐주는 여자가 아이를 데려다주고, 오늘 잠깐 이야기를 하는데, 동서인가? 아마 서로 사이가 그런 거 같은데, 뜬금없이 귀띔을 하듯 그러는 거야. 아이엄마가 글쎄, 지방에서 몸 파는 일을 한다는 거야. 곁에 아이들도 있어서 얼른 복도로 나가서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웃어보내기는 했는데, 종일 마음이 쓰이네? 설마, 하면서도 괜히 마음이 어려워진 것은 아이가 너무 불쌍하게 여겨져서라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 저들 삶에 대해서는 나도 전에 곁에 무슨 사무실을 쓰던 당사자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대부분 브로커를 끼고 남하하여, 저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남한에 정착을 해도 그 돈을 갚느라 애들 쓴다. 기껏 돈 벌면 브로커에게 이자원금 갚고, 북에 보내고 하면 사는 게 늘 궁벽하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아이에 대해 남다른 마음으로, 가정예배를 드리며 저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다들 참, 사는 게 지옥 같다.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들의 심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툭,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푸념과 원망이 절로 났던 것도 실은 은혜를 은혜로 누릴 수 없어 은혜마저 부담스러운 빚으로 여겨졌을 테니. 종 된 자의 삶이란 게 참 고달프기 짝이 없다. 종종 사역을 감당하는 누구와의 통화에서도 대부분 오늘 본문의 큰 아들과 같은 서러움이어서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로 설명해주어도, 저는 또 다 안다.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늘 그것으로 더하기 빼기를 하고 앉았으니 손익계산에서 번번이 하나님한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아는 게 저에게는 도리어 더 무겁다. 도대체 우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간절히 사모함은 무던함을 수반한다. 영이 뜨거운 가운데 거하는 일이지, 마음이나 몸으로야 그저 죽을 맛인 것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는 자발적이면서도 송구스러운 일이다. 해봐야 내가 뭘 한다고, 이처럼 후하게 더하시는지. 그러니 이만큼은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게 가당키나한가?
대체 우리가 무엇으로 깨끗할 수 있을까?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결국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오늘 아침에도 말씀이 나를 이끌어다 두시는 자리에서 나는 여러 생각에 젖었다. 그러다 내가 꼭 뭘 해야 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고, 하든지 안 한든지 그 모든 데서는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이 있었다. 이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이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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