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1. 2. 28. 06:05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13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너무 애를 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는 것이다. 몸은 경직되고 마음은 어렵다. 그러지 말아야지, 그럴 필요도 없는데, 하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애쓰고 수고해서 이루는 사람이 아니다. 가르침을 받고 그리 따르는 사람들도 아니다. 가장 큰 오해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라 여기는 데 있다. 가르침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마음으로 인정하고 납득한 만큼 몸으로 실천하는 삶이 이상적인 사람의 가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자기 의지를 운운하는 것 이상으로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 판단과 기준, 애쓰고 수고함을 모두 주께 의뢰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은 우리의 이해를 배제하고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실 때 예수님은 저들의 지식이나 이해 정도를 보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마음으로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데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에는 저항이 따른다. 그래서 나는 긴장한다. 애쓰고 수고하게 된다. 그것으로 예민하여 정신이 주체할 수 없어 약물에 의존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를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그만큼 나는 어리석고 연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은 괴롭다. 가끔은 안정제를 의존해야 하는 것에 자책과 수치심이 들기도 한다. 믿음과 신앙으로 이겨내야지, 하는 당위적인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그럴 때 나는 더 주를 바란다. 내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다는 데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더디게 배운다. 더딘 까닭은 이성과 판단이 늘 나의 신앙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정하고 수긍하고 납득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리 해야 한다고 여기는 판단이 평안을 가로막는다.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번번이 또 감정에 휩쓸리고 기분에 따라 좌우된다. 몸은 저 혼자 아팠다 말았다 하고 왜? 하는 질문 앞에서 나는 나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다. 참으로 나로 사는 일은 고단하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은연중에 나의 판단과 하나님의 명령을 나란히 둔다. 내 안에 두 주인이 거하는 셈이다.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만 사랑해야 한다는데, 주를 사랑한다는 마음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 그 마음은 의외로 커져서 마뜩찮으면 서럽고 억울하기까지 하다. 하나를 중히 여기면 하나를 경히 여겨야 한다는데, 주를 바라고 의지함을 중히 여긴다고 하면서도 그에 따른 나 또한 존중받고 싶고, 누구에게든 인정되기를 동시에 바란다. ‘하나님과 재물’ 곧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셈이다. 어느 것을 중히 여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를 버려야 한다. 같이 섬기려고 하니까 내적갈등이 끝도 없다. 서로가 대립하면서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몸은 경직되고 마음은 어려워서 혼자 끙끙거린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 나를 번번이 넘어뜨린다.

 

결국은 일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라는데도 나는 내 몫을 다하겠다고 열심을 부린다. 이는 성실함과 충성으로 비춰지지만 오만함이다. 불신앙인 것이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을 수 없고 맡길 수가 없다. 내가 신경 쓰고, 나도 관여해야 할 것 같아서 자꾸만 개입한다. 그러느라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쓴다. 불편한 게 싫으면서 불편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내 몸과 기분은 별개가 아니다. 느낌과 생각은 저들끼리 앞서 간다. 자식들과의 관계도 아내와의 관계도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게 없다. 남들 시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를 바라려고 하니 주를 바라는 것이 여간 일처럼 여겨지는 게 아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같다. 나를 돌보는 일만 해도 고달프고 힘들다. 그만큼 애쓰고 수고해야 하는 관계에서 놓여나지를 못한다. 나는 경직된다. 요즘 부쩍 안정제를 많이 먹게 되고, 자주 가슴이 답답하여 숨 쉬기가 어렵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누구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나름 나에 대한 분석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런 나를 말씀 앞에 앉히면 말씀 또한 다그치는 것만 같아 어렵다. 강박적으로 책을 읽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묵상을 하는가 싶다.

 

결국 아내는 무릎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들과는 점점 눈도 마주치기 어렵다. 딸애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눈치를 보게 된다. 저들은 괜찮은데 나만 그러는지, 그렇게 의식하고 생각하는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나는 애쓰고 긴장한다. 부딪치지 않으려 하고, 뭔가 불편해지는 것을 회피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고, 그에 따른 불안은 오롯이 혼자 짊어져서 가중된다. 단적인 예로 전에 같으면 할 말 못할 말 다하면서 내 뜻을 강요하고 윽박질렀을 것이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를 내고 명령을 하고 통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우니 내가 나를 옥죔으로 불안은 심화된다. 거기에 몸도 전 같지 않아서 하루가 멀다하고 어디가 아프다. 마음도 의지와 달리 혼자 낑낑거리며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하루의 피로가 순식간에 밀려와 몸은 기진한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강한 의지로 인한 부작용이다. 그렇게 말했는데 결국 아내는 수술을 하게 됐다!  내 맘 같지 않은 자식들과 내 몸과 어쩔 수 없는 감정까지! 같이 아내의 운전 연습을 해야 하는 것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싫다고 거절할 수 없는 것들이 목을 조인다.

 

그런 나에게 거듭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나를 개선하여 새로운 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전혀 다른 나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어떻게 내가 이를 감당하겠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일이라니! 나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죽겠다. 반기를 드는 몸의 저항과 마음의 불안정은 안정제를 곱절로 먹고 있는데도 수습이 안 된다. 실은 그럴 이유가 없다. 맡김이란 알아서 하시게 놓아둠일 텐데, 내버려두는 일은 받아들이는 일과 같이 내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 의지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의 불안, 초조, 긴장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한다. 불안과 초조는 결코 선한 게 아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은혜가 아니다. 병마(病魔)라 하여 말뜻 그대로 사탄이 부리는 영이다. 이를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이 소중함으로 이를 잃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별적인 은혜로 해석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나로 생겨먹은 게 그 모양이라 그렇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일이다. 내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안다고 하나 나는 내 의지나 노력으로 이를 어찌할 수 없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만 이를 앎으로 주 앞에 아뢴다. 

 

너무 애쓰는 모든 것은 불신앙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도자들이 아니다. 스스로 납득한 것을 이해하여 수긍함으로 따르는 게 아니다. 주 앞에 이처럼 나를 토설할 뿐이다. 말씀으로 정신을 모은다.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이른 아침에 나는 글방으로 나가 혼자 있는 아침을 좋아한다. 차를 마시고 간단히 빵이나 삶은계란으로 아침을 먹는다. 묵상글을 읽으며 음악을 듣는다. 그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좋다. 그렇게 좋은 시간에 비해 왜 평안하지 못한 것일까? 오전에만 하루치 안정제를 다 먹는 날이 많다. 나는 나를 분석하다 그만둔다. 더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말씀을 바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머리로나 나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렇듯 몸의 저항은 거칠고 마음을 흔들어대지만 그럼에도 무던히 걸어가는 길!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를 나의 성격이 고쳐지고 기질이 바뀌어 품위 있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여덟 가지 사람의 유형을 마치 내가 일구어야 하는 믿음의 자세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바라고 구하면 바라고 구할수록 나야말로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 부딪칠 뿐이다. 거듭남? 그게 내가 이룰 수 있는 영역인가? 단지 성향의 문제이겠나? 마음이 온유하고 가난한 자로 산다는 것, 이를 인위적으로 바란다고 해서 얼추 맞추고 사는 정도를 말씀하시는 것이겠나? 우리는 구도자가 아니다. 나는 좌절한다.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서 나는 절규한다. 나의 몸의 항거를 멈출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의 저항이 뚜렷하다. 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말씀 앞에 나는 승복한다.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주 뜻대로 하옵소서! 이처럼 말씀 묵상을 하면서도 어떤 불안이 엄습하여 나는 속수무책으로 내게 당한다. 저마다 의지의 문제로 알고 애쓴다. 애쓰고 수고하여 이룰 수 있는 구원은 없다.

 

주를 경외함이란 두 손 들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 산상수훈의 사람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나로서는 이룰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다. 다만 주께 두 손 들고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나의 행위를 아뢸 뿐이다. 나의 나 됨을 주 앞에 내려놓으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