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한복음 2:24-25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편 138:7
우리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주가 아신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 처음 사람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하물며 그의 죄로 물든 우리 영혼은 오죽하겠나? 유혹이란 해본 사람에게 더 강한 법이다. 담배를 안 피워본 사람보다 피워본 사람이 흡연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성적으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더욱 성욕도 느끼고, 게임에 대한 재미를 아는 사람이 그와 같은 욕구에 시달리는 것과 같다. 우리 속을 주가 아신다는 오늘 본문의 언급이 나는 그리 읽힌다. 사람 사이, 별 거 없다. 어제도 누가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데 나름 친분이 있고 잘 안다고 여기던 사람으로부터의 공격이라 저는 더 당혹스럽고 불쾌해 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본래 가까울수록 아찔한 것이다. 아무리 나이 들어도 어릴 적 엄마에게 또는 아빠에게 당한 서러움을 신주단지처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그들의 증언이란 게 얼마나 위선적이며 작위적인 것일 텐가.
그런 가운데 어제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이것 하나면 다른 어떤 사람의 무슨 호의도 크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 시편도 고라 자손의 지은 노래다. 45편을 준비하다 알게 된 것처럼 저들 조상 고라는 일찍이 모세와 아론에 대적하여 하나님이 저들과만 함께 하시는가? 반역하다 지진이 나서 그 일당 250명이 그 자리에서 땅에 삼킴을 당했다. 저들의 ‘마스길’이란 교훈을 얻은 바인데, ‘생각하다’, ‘깨닫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고라와 그 일당은 치시면서 그의 자손들은 남겨두셨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11).” 이 일로 훗날에 저들 후손은 성전에서 찬송 맡은 자로 헌신하며 살았다. 우리가 성경으로 깨닫고 생각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삶을 바꾼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므두셀라의 이름의 뜻은 심판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므두셀라는 969세로 인류 역사상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오래 참고 또 참으신 것이다. 저가 죽는 날, 120년 동안 지었던 노아의 방주가 완성되었고 홍수 심판 첫 날의 첫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분명히 노아는 그 지난한 세월을 방주를 지으며 므두셀라 할아버지의 이야기, 심판을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노아의 그 놀라운 경험과 역사의 엄청난 새로운 시작을 아브라함은 노아 할아버지에게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놀랍게도 노아 할아버지가 죽던 날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땅을 향하여 나아갔다.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두려워 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의 두려움은 사는 데 따른 사람들과 같은 두려움이 아니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무엇을 두려워할 줄 아는지, 그것이 관건이다.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얼추 그 부모들이 노년을 맞으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시기이다. 곧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연세들이라, 누구는 아버지의 시간을 아까워하며 가족끼리 여행을 준비하고 본인도 이를 원하신다. 누구는 여전히 완고하여 철들지 않는(?) 모친의 요구와 갈등으로 힘들어한다. 며칠 전에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할 때였다. 한 여성이 영상 통화로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는 중인가 보았다. 곁에는 서너 살쯤 된 딸애가 뒤뚱거리며 앞서 걷고 있었고, 아이엄마는 영상 너머의 엄마를 연신 부르며, 밥은 먹었어? 무슨 반찬? 맛은 있었어? 어이구 잘하셨네, 우리 엄마. 어디 아픈 덴 없고? 어이구 그러셨어? 엄마? 엄마! 하면서 화면을 들여다보고 목청껏 엄마를 부르며 통화를 하는 모습이 뭉클하였다. 이를 보며 저이의 상태가 어떠한가 짐작이 되었다. 아이는 순하기도 하지, 엄마가 자꾸 엄마, 엄마, 하고 부르면 그때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엄마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서너 걸음 뒤에 물러서서 천천히 저들 삼대 모녀의 걸음을 따라갔다.
다윗이 다윗일 수 있는 것은 저의 광야 때문이었다. 모세가 모세일 수 있는 것은 저가 저버린 왕궁과 내몰린 광야 때문이었다. 나는 그리 짐작한다. 상대적으로 모진 세월이 없었던 솔로몬의 넘치는 축복은 저에게 오히려 망각의 늪이 되어 노년의 방종을 촉발했다. 시편 46편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를 또 한 번 확신하였다. 고라 자손의 이와 같은 찬송은 저들이 겪는 환난과 전쟁을 치르면서의 고백이다. 때는 아마도 남유다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의 성곽이 무너지고 저들이 급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의 진술로 추정된다(B.C. 701-699, 왕하 18:13-19:37). 그때에 저들은 기도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참, 사람들의 덧없음은 끝내 살아서 사는 동안에 어려움을 겪을 때의 고백이다. 아니면 늘 나른한 영혼이라, 안일함에 빠지기 십상이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33:20).” 도우심을 바라고 강구할 때 또한 우리의 방패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를 보장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와 같은 말씀보다 더 나은 위로가 또 있을까?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할 연세의 부모를 곁에서 지키며 그 애타는 심정으로 우리가 주께 구하고 바랄 것이 무언가? 아버지는 좀 어떠셔? 하고 친구에게 묻자, 친구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냥, 기력이 좀 없으셔서… 하며 마음이 어렵기 그지없었다. 그럴 때 우리가 바랄 게 무언까? 하나님은 우리의 환난 중에 바랄 큰 도움이시다. 저를 의뢰함이 요동치 않는 것이 믿음이다. 온갖 염려와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우리 영혼을 쥐고 흔들기 일쑤지만,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5:2-3).” 마치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며 바다가 용솟음치는 것 같이 죽을 맛이라 해도,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어릴 때, 아직 부모가 기력이 있어 언제까지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야 싫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였지만 우리 모두는 기어이 늙어서 병들고 쇠하여진 몸으로 서로에게 의탁을 한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의 죄의 결과로 온 인류가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숙명이 되었다. 누구도 예외는 없어서 혹여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정사실 앞에서도 우리 안의 죄의 근성은 이를 외면이다. 설마, 하고 자신은 멀리 둔다. 그래서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다. 믿는 우리 또한 두려움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닌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를 바울은 더욱 선명하면서 아름답게 진술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아,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알고 간직하고 이를 위하여 성화를 이루어가는 사람보다 귀하고 복된 사람은 없다. 저마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 모든 불행은 남들 이야기처럼 여기고 자신은 천년만년 살 줄 알고 망각의 힘으로 산다. 이를 시인은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5:4).”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으니 우리는 어디로 떠내려갈 것인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문맥적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황혼은 초라하게 결말을 보기 일쑤다. 사는 동안 호화로웠던 모든 생의 구조는 무참히 무너진다. 그러나 주는 우리로 일깨우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주신 날을 채워갈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그런 우리의 하나님은 새벽에 도우신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5:5).” 새벽은 어둠이 물러나는 시간이면서도 가장 춥고 어렵고 깜깜한 시간이다. 새벽은 하루를 여는 시간이다. 누가 나더러,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난다니까 늙어서 그런가? 하고 웃었다. 모름지기 나는 이 시간의 소중함을 사랑한다. 창가에 앉아 아직 모두가 단잠이 든 시각에 말씀 앞에 앉히는 일. 그러기 위해 나는 밤 시간을 버렸다, 아홉시 열시만 돼도 서둘러 잠을 청한다. 놀랍게도 이 영광의 시간을 아는 시인들은 동일한 노래로 화답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또한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08:2).” 이는 그저 막연한 한두 번의 수고가 아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님도 이 시간의 고즈넉한 영광을 알고 계셨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가장 내밀할 수 있는 시간, 아무 것으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고 가만히 주만 바랄 수 있는 시간. 나는 이 시간의 강권하심을 체험한 적이 있다.
자살을 기도하고 낚시터에서 죽으려 하다 도로 주께 붙들려 왔을 때, 그때부터 나는 이상할 정도로 새벽예배를 나갔다. 당시 다니던 교회는 그 시각에도 차로 20분은 달려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신대원을 한 번 떨어지고 이 길이 아닌가, 하고 갈등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새벽예배로 이끄셨다. 가면 또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 왔다. 그때 나는 성도들과도 아무런 교제가 없던 시절이라 혼자 울다 혼자 돌아오는 시간이 일 년 반 더 이어지고 나서야 신대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그때는 하루의 전부였다면, 오늘에 이 시각도 나의 하루의 시작이면서 전부이다. 하나님은 새벽에 도우시는 이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5:5).” 어째서? 나는 이 시간을 위해 하루를 준비한다! 묵상글을 쓰면서 유익한 것은 이를 위해 메모를 하고 전날의 일과를 정리한다. 시편은 특히 우리의 정직함을 요구한다.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진술한다. 때론 왕이 쓴 글로 치면 민망할 정도로 징징거리고 투정하고 도움을 간구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새벽이다. 이를 강하게 느끼는 것은 뭇 나라들이 주의 권세 앞에 떤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시 46:6).” 저들이 겁내고 무서워 벌벌 떠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가장 친숙하고 친밀하다. 무슨 소린들 못할까? 어떤 소리인들 주저할까? 그래서 때론 나의 묵상글이 민망할 정도로 자주 죽는 소릴 해대는 것 같으나, 그래도 되는 시간이 새벽이고, 그 새벽에 하나님의 도우심은 내밀하고 농밀하고 적극적이시다.
곧 또 나의 연약함은 날이 밝으면서 일상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기 일쑤일 테지만,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7-8).” 이를 더하고 다지는 시간이 새벽이고, 그 새벽에 하나님의 도우심은 세미하고 분명하시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이를 고라의 자손들은 찬양하고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46:7).” 하나님은 결국 승리로 이끄시고 우리로 평화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8).” 곧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9).” 이는 괜한 추측이나 기대가 아니다. 직접 하신 말씀이고 약속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
이를 앎으로 나는 이 새벽을 사랑한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하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그러므로 시인은 확신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11).” 설교원고를 작성하며 준비하는 시간이나 새벽에 묵상하며 말씀으로 세움을 받는 일에서나, 오늘 시편은 이를 단호히 언급하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138: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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