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전혀 다른 나로 앉았다. 아이들은 어느새 스물일곱, 열두 살 때 만났으니 꽤 긴 시간을 같이 알고 지낸 셈이다. 무엇으로 바라고 말할까? 아이들이 오는 시간에도 나는 주께 아뢰었고, 해야 할 말을 입에 더하시기를 구하였다. 며칠째 허리가 아파 힘들었는데, 아이들과 있는 시간은 다행이었다. 은연중에 나는 주를 수시로 바라였고 이를 말로다 드러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이처럼 주가 이루시는 세계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곧 우리가 거듭나야 하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이러한 말씀 앞에 부복하고 그 말씀이 저 아이들의 영혼을 어르시고 계심을 믿는 일이 기이할 뿐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오늘의 나는 내게도 낯설다.
살면서 어찌 낙담이 없을 수 있겠나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하시는 말씀 앞에서 한 녀석을 오래 생각한다. 누군들 살면서 시험당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낙심하여 주저앉은 채 수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었으니, 한 아이는 아까웠고 한 아이는 안타까웠다. 나는 그 차이를 서술할 수 없다. 다만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주는 선하시다. 어떠하든지 우리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 73:1).” 하나님이 선을 행하신다는 기본 전제가 무너지면, 기준은 흔들리고 모든 것은 끝장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그러기에는 세상이 더 잘 사는 것 같다. 이를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도 우리로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 아니면 곧 미끄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아이들 앞에서 나의 존재는 두려울 정도로 의미가 있다. 교사로 목사로 산다는 일은 두 배로 막중한 일이다. 나름 좋은 기억으로 남아, 때가 되면 이처럼 잊지 않고 찾아오고 반가움을 나누는 일에서는 좋으나 나는 이제 저들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뢴다. 전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싶었는데. 그리하여 누굴 대하고 위하는 마음이 자칫 내 것일까, 요즘 나는 그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주의 것이 아니면 언제든 변덕스러워 나도 나를 자신할 수 없다. 시험의 세력을 바로 분간하지 못하면 자칫 부화뇌동하며 금세 일희일비하기 십상이다. 가령 내가 저 아이에게 드는 마음이 내 것인가, 주의 것인가. 오늘에 두시는 이와 같은 시험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나 기분에 따라 이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내 의지로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나는 돼도 않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각각 저들에게 주의 살아계심을 알리고 바로 알기를 권하였다. 그 말이 저들 가운데서 어찌 작동하게 될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거짓말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다. 오후 늦게 아버지는 수술실로 들어가셨고, 은근히 나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나는 다만 주를 바라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오늘이 이 주옥같은 말씀 앞에 모든 열쇠가 있다. 우리 안에 여러 간사함이 있으나 주를 더욱 알고 바라고 의뢰하게 하시는 성령의 주도하심으로 이를 안다. 하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시는 말씀의 의도는 뚜렷하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 터무니없는 말과 생각은 호시탐탐 우리를 주도하려 든다. 감정이 가장 문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주장하려 든다. 그러해도 주를 의뢰하는 일. 나는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걸 해!’ 하고 말해주었다. 한 소녀가 있었다. 의사가 되어 많은 사람을 치료하는 봉사자가 되길 바랐다. 열여섯에 골결핵을 앓았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그 병이 낫기만을 바라고 기다렸다. 낫기만을 위해 기도하고 나으면 정말 보람된 일을 많이 할 거라 재차 다짐하며 세월을 참고 견뎠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동안 서른여섯이 되었다. 문득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 하는 소리가 저의 마음을 쳤다.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로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늘 기도의 주제는 낫기를 바라고, 그동안 소망하는 모든 게 자신이 나으면 할 일로 미루고만 있던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니! 돌아누우며 감사하기, 말 한 마디라도 친절하기, 어떤 날은 좀 나아져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은 남을 도와주기… 저의 변화된 모습은 조금씩 병실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일간 병동 전체로 소문이 나고, 병원 전체에 퍼져갔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세요!' 저의 이름을 따서 그와 같은 운동이 확산되었다. 환자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들불처럼 다른 병원으로도 알려졌다. 저의 다짐과 구호는 새로운 희망으로, 낙심한 이들에게 실천이 되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 훗날에 저이는 ‘하나님은 자신을 의사가 세워 환자를 돌볼 수 있었을 숫자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기적으로 갚아주셨다.’고 고백하였다. 어느 날 나도 저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이 가슴에 남았다. 어디가 아프고, 뭐가 어렵고, 무슨 일이 어떻고 하는 시험이 없는 세상은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그 일이 내게는 오늘도 묵상이고, 오늘도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고, 오늘도 누굴 마주하면 말로다 이를 돕는 일이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나의 기도가 된 것이다.
어려움을 겪고 시험을 당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님도 그러한 공격을 받으셨다. 이를 가벼이 여기고 대충 얼버무리려는 것은 죄다. 뭉개고 미루는 것도 죄다. 이를 성경은 ‘악한 자의 불화살’이라 하셨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엡 6:15).” 부끄럽지만 나는 아이들이 오기 전에 안정제를 먹었고, 한참 대화를 하다가도 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나의 약함은 주가 아신다. 주가 모르실 리 없다. 그럼에도 내게 허용하시는 일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려 하심이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 전제다. 나의 이와 같은 이야기도 가감 없이 아이들에게 나누었다. 나는 결코 저들보다 나은 사람도, 무슨 능력자도 아니다. 오히려 더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다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러할 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어서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이 속의 상처는 알겠으나 그러니 뭘? 저의 안타까운 사정으로 숨이 턱, 막히지만 그러니 뭘 할 수 있겠나? 나는 기도뿐이고, 나의 기도는 나로 하여금 주 앞에 바로 서게 하는 열쇠였다. 그리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나는 요한의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 가는 길의 이정표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흥하면 주는 쇠하여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에 같은 층에 있던 교회의 사모를 만났다. 잠깐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같이 동역하여 다른 층으로 넓혀갔던 두 교회가 떨어져나간 모양이다. 그때는 서로가 뜻을 합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교회를 확장하고 더 나은 층으로 옮겨가더니. 수심이 가득한 젊은 사모의 말을 듣고 돌아서는 마음이 어려웠다. 그럴 때보면 나는 무모할 정도로 한 자리를 지킨다. 일찍이 내가 하는 게 아님을, 심지어 내 몸 하나 내가 건사하고 주도할 수 없음을 알았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어, 언제 목사님과 함께 차 한 잔 하러 오시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지나치게 의욕이 앞선다싶더니.
주께서 하시게끔 그 자리를 내어드리는 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하는 누구의 말이나 저들 재단의 구호보다도 먼저인 것은 ‘하나님이 하시게 해!’ 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었다. 내가 나라고 나를 다스려지던가? 자식도 내 마음 같지 않은데, 하물며 ‘좋은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저 아이들에게 내가 무얼 줄 수 있겠나? 말씀뿐이고 기도밖에 없었다. 처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가시적인 성과도 없고 아무런 발전도 없는 것 같으나,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나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그리 아뢰었고 저들에게는 주의 선하심을 알리었다. 서너 시간 같이 있다 돌아가고 나는 그 일조차 힘에 겨운 사람이었으나, 이 아침 내게 주시는 지혜가 크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하물며 저들을 어찌할 수 있겠나? 내게 두시는 관계와 마음쓰임과 그로 인한 주께 아룀이 곧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하시게 나를 맡겨드리는 일이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시 139:1).”
주 앞에 나를 내어드리는 것,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 주는 먼저 다 아신다는,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39:2-4).” 이를 두려워하며 주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이 주의 것이겠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7).” 곧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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