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전봉석 2021. 3. 12. 06:04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요한복음 4:38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시편 140:7

 

 

우리가 무슨 노력으로 주의 사랑을 얻는 게 아니다. 어떤 수고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암브로스는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에서 야곱의 축복을, ‘에서의 옷을 훔치고 에서의 냄새로 자기 몸을 숨겨 장자인 것처럼 하여 축복을 가로챘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의와 구원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숨기고 도말하여 의인인 것처럼 인정받아 구원에 이른 의이다. 존 번연은 이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디 있든, 어떤 상태로 있든, 하나님은 우리 의가 부족하다고 버리실 수 없다. 우리의 의는 더 이상 의로울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더럽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이다.’

 

이를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되새기면,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8).”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결과를 사는 게 아니다. 은혜란 거저 얻은 것으로 이를 바로 알면 알수록 송구하고 부끄러우나 횡재한 기분도 든다. 누구와 통화하다 저들의 수고와 애씀에 대해 듣고, 그에 따른 갈등과 어려움을 생각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 구원의 핵심을 다시금 연상하였다. 무얼 잘 해서가 아니다. 어떤 조건에 갖춰져서도 아니다. 그리 덧입은 의다. 하나님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러실 수 없다. 우리 의를 정죄하신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정죄하는 것으로, 자신을 부정하시는 일이 된다. 마치 나는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의롭다. 이는 의롭다 하신 이의 의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정죄하지 못하신다.

 

오늘 시인은 찬송한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시 140:7).” 내가 싸워 이겨야 할 싸움이 아니다. 상대할 수 없는 이를 상대하는 일은 진이 빠진다. 언제부턴가 나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 사람일수록 ‘주 때문에’ 사랑한다. 주를 통하지 않는 사랑은 금세 지치고 변심하기 일쑤다. 좋을 땐 간 쓸개를 다 빼주고도 모자랄 것 같은데, 마음이 상하면 온갖 저주의 마음이 삽시간에 휘젓는다. 감정에 따른 사랑은 믿을 수 없다. 사람 좋은 거, 믿을 게 없다. 어느 목사는 그렇게 몇몇 동역자들과 뜻을 합쳐 ‘어려운 시국’에 교회를 살리려고 연합을 했다. 한 공간을 각각의 교회가 같이 모여 연합교회로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우리 행색도 나은 게 없어 보이니 그리 권하는 눈치였으나, 차마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두어 해가 지난 지금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덩치만 부풀린 교회는 저들 몫이 되어 부담이 심한 모양이다.

 

우리의 의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의롭다 하시는 이의 의가 아니시면 99.9999% 의롭다 해도 0.0001% 악함으로 악한 것은 악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한 점의 죄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 구원에 들어갈 수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장자가 될 수 없는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속여서 산 것처럼, 에서의 행색과 체취로 자신을 숨겨 축복을 받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십자가 밑에 숨기고, 주의 보혈로 가려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같다. 한 농부가 밭에 감추인 보물을 알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이 밭을 사는 일과도 같다. 믿음이란 이처럼 황당하고 무모하며,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과 같다. 그래서 나는 존 번연의 과감한 이해와 해석이 참 좋다. ‘하나님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바울은 이를 알면 알수록 예수를 아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 같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가난한 농부가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형 에서의 땀내 나는 옷과 털로 몸을 숨기고 축복을 소유하려는 야곱과 같다. 천국은 마치 예수를 알면 알수록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전부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누구던가? 저는 일찍이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로 율법을 고수하며 철저하게 의를 이루어 가는 바리새파와 그 수장 가말리엘의 제자였다. 그 열심으로 저는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는 자였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5-6).”

 

이 화려한 이력과 수고와 열심이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의 자격 없음은 기정사실이고 이를 바꿀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는데,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려고 그처럼 애쓰고 노력하며 몸부림치던 자였다. 그 일의 결과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로 ‘율법의 의로운 흠이 없는 자’였다. 이를 저는 다 쓸모없는 것, 배설물로 여겨 버렸다.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0-12).” 우리가 잡은 게 아니라 잡힌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와 같은 진리 앞에서 안도한다. 내가 이룬 의가 아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지. 사람을 신뢰하지 않듯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누구에 대한 감정, 어떤 느낌, 기분 심지어는 바라는 소망 따위도 그때는 그게 전부인 것처럼 죽을 것 같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변심하기 일쑤라. 자식에 대한 염려나 기대, 나 자신에 대한 바람이나 애씀 이 모든 것도 하등에 가치가 없다. 온전히 예수를 아는 것, 나의 구주로 믿는 것, 예수 아니면 모든 게 허사라는 것, 그러므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하는 찬송이 나는 이제 전부였으면 좋겠다(새찬송가 94장).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를 못한다. 그래서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도 다 버린다.’ 이처럼 이어지는 찬송가 가사를 음미하며 그게 나의 남은 생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만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지.’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왜 그처럼 하나같은지 이제는 알겠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리하여 얻은 의를 누가 빼앗을 수 있겠나? 하나님도 이제 우리 의를 정죄하지 못하신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다. 내가 아내를 대할 때, 요즘은 아들을 대할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욱, 하고 올라오는 어떤 감정이나 화를 피식, 풀어버리고 마는 까닭은 저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를 알기 때문이다. 내 곁에 두시는 주의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주여, 하고 속으로 한 번 되뇌고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넘긴다. 내 몸의 요구나 마음의 갈망도 다르지 않다. 기도의 99%가 날 위한 것으로 뭐 그리 바라고 구하는 것마다 나의 필요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그런가보다 하고 줄인다. 오히려 더는 얽매이지 않게 되기를 구한다. 그러는 동안 엉뚱하게도 저이를 위해, 엊그제 다녀간 아이들을 위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공부방으로 오는 안 믿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위해, 저들의 황폐한 영혼을 두고 그 그릇된 영혼의 척박함을 생각하며 주께 아뢴다.

 

죽으면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한탕주의식 삶을 보며, 그러다 일순간 숨을 놓는 국가로 OECD 가운데 1위를 차지한다는 자살률을 두고, 나는 이제 두려워한다.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스스로 죽든, 병들어 죽든 모두는 어쨌든 죽는다. 죽음으로 끝인 줄 아는 단멸론은 가짜다.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기다린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어떤 이는 성자 성녀로 추대되어 의로움을 안고, 어떤 이는 평생 사회활동가로 동물과 자연과 모든 생명을 사랑하다, 어떤 이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며 희생과 헌신과 봉사로 자기 의를 가지고 그 앞에 서겠으나 모두는 허사다. 나라를 수십 번 구하고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 한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걸치고 그의 보혈의 향기에 내 죄를 가리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심판장의 의에 만족되는 의를 갖춰야 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3-5).”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 그저 늘 송구하고 감사한 마음뿐. 누가 아니꼽고, 어떤 일에 배알이 꼴리고, 일순간 화가 또 슬픔이 나를 가로채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주의 은혜밖에는 내가 숨을 곳이 없음을, 이제는 안도한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8).” 나는 나의 노력으로 이룬 게 없다. 우리 아이들이 이만큼 반듯하게 자라준 것도, 저와 같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아내를 두신 것도, 나 같은 사람이 목사랍시고 교회를 맡은 것도, 무엇보다 이처럼 말씀 앞에 가만히 주의 은혜를 바라게 하심도! '은혜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안도한다. 오직 주만 바람으로, 나의 감사의 힘은 나의 무력함에서 나온다. 나의 쓸모없음이, 버림받아 마땅함이, 나로 하여금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게 한다. 나는 그 이름을 부른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시 140: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