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6편 /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전봉석 2021. 3. 12. 10:14

210314 주일

 

시편 46편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1-3).”

 

 

들어가는 말

 

지난 시편 25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세의 사촌인 고라는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 온과 함께 무리를 지어 다른 족장들 250명과 합세해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 그때 하나님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을 땅이 갈라져 삼키게 하셨고, 250여 명의 무리를 불태워 죽이셨다. 훗날 고라의 자손은 선조의 이러한 과오를 교훈 삼아 ‘마스길’을 지으며, 성전에서 찬양하는 일을 맡아하였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11).” 부제에 덧붙인 ‘알라못’은 여성의 고음(高音)이란 뜻으로 일명 소프라노 음색에 맞춰 가사를 전달하는 음악적 기법이다.

 

처음 사람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죄의 유혹에 무너지면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분-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직분을 상실하였다. 저는 선지자로서 모든 사물의 이치와 상황에 맞춰 이름을 짓는 예언자였다. 주의 뜻을 알고 이를 선포하는 일이었다. 또한 제사장으로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안식과 쉼을 누리던 자였다. 그뿐 아니라, 왕으로서도 이 모든 것을 다스렸다. 물론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나 부끄러움도 완전하게 통치하던 자였다. ‘완전한 사람’으로는 이를 지속할 수 없었다. 저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하신 직분들도 잃었다.

 

이를 지난주일 시편 45편에서 확인하였다. ‘완전한 사람의 의’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오늘 우리가 덧입은 의는 그리스도의 의다. 우리의 직분은 회복되었다. 이를 연마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중생과 성화는 ‘믿음’으로 동시적이다. 그러나 중생은 단회적이고, 성화는 연속적이다. 즉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러할 때 수시로 원수의 공격은 이어진다. 사탄의 공략은 훼방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저해시킨다. 자신의 기질과 의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러므로 우리는 고달프고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시다. 이에 오늘 ‘고라의 성가대’는 소프라노의 높은 음색으로 우리를 응원하며 축복한다.

 

 

1연(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큰 도우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전 시간에도 밝힌 바,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나 알림표가 아니다. 이를 삶으로 살아서 우리 안에 녹여져야 한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그렇게 심판의 경고를 안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다. 므두셀라가 죽던 날, 120년간 지은 노아의 방주는 문이 닫혔고 대 홍수의 첫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노아 역시 므두셀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이를 인내와 무던함으로 삶에 버무렸다. 인류의 홍수 심판 후, 아브라함은 노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라 하실 때, 저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이는 노아와 그의 방주 이야기와 홍수 심판의 이야기를 저는 삶으로 받아들였던 증거다. 우리가 주를 경외함이란, 말씀을 삶으로 받아 이를 준행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원동력은 참으로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다윗이 다윗일 수 있었던 것은 저가 쫓겨 다니던 광야가 있었다. 모세가 모세일 수 있었던 것도 저가 버린 왕궁과 내몰린 광야에서의 단련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솔로몬의 넘치는 축복은 저의 노년에 망각의 늪이 되었다.

 

오늘 본문, 시편 46편은 환난과 전쟁을 치르면서 고라 자손이 지은 시이다. 남유다 당시 히스기야 왕 때로 추정된다.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 급박한 위기에서 오히려 저들은 놀랍게도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찬송을 지어불렀다(B.C. 701-699, 왕하 18:13-19:37). 곧 우리 믿는 자들의 놀라운 저력은 만사형통이 아니고 곤고함과 어려움이다. 시인은 노래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곧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33:20).” 이러한 찬송이 드려지는 것은 어렵고 힘들 때이다. 곧 어둡고 캄캄할 때 빛은 발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와 같은 찬송은 무난하고 순탄할 때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2-3).” 오늘 본문의 찬송은 이처럼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며, 바다가 용솟음치는 것 같은, 사는 게 힘들고 죽을 맛일 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하는 고백과 영광이 올려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이를 바울은 더욱 아름답고 실질적인 표현으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처럼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경험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2연(4-7).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신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5:4).”

 

인생에는 늘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문맥적으로만 봐도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어떠한지 짐작이 된다. 상대적으로 우리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사는 삶이다. 사는 날 동안 이를 연마하고 훈련한다. 그런 가운데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감사로 찬송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할 때 성소에 사는 성도들의 삶의 특징은 뚜렷하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곧 새벽은 어둠이 집약된 시간이면서 그 어둠이 물러나는 시간이다. 어제가 지나고 새날이 밝아오는 시간이다. 새벽은 가장 춥고, 깜깜하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새벽은 곧 미명이 밝아올 것을 아는 소망의 시간이기도 하다. 찬송은 이구동성으로 노래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이어서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08:2).” 곧 이 찬송의 실천은 삶에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이는 모든 하나님 자녀의 시간이다. 하루 중에 아버지와 가장 내밀한 시간이다. 매일매일 이 시간은 하루의 시작이면서 전날의 끝이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번잡스러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이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6).” 곧 하나님의 소리는 세미하고 광대하시다. 우리는 모두 자신들의 새벽을 깨워야 한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만이 아니라, 가장 고요하게 그리고 가만히 주를 바랄 수 있는 시간으로,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 일 때,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대하 32:7-8).” 말씀은 저마다의 새벽에 가장 선명히 들린다. 또한 우리의 새벽은 가장 주를 바라는, 고단하고 괴로운 순간의 총칭이다. 그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46:7).” 우리의 새벽, 하나님이 도우시는 시간은 곧 우리 영혼의 피난처가 된다.

 

3연(8-11).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보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8-9).”

 

곧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안 믿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는 체험이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이에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18).” 우리는 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마치 금고에 귀중품을 두고 패스워드를 아는 우리는 언제든지 들어가 이를 확인하고 꺼내올 수 있다. 때론 늘 사는 게 각박하고 고달픈 일 같으나 돌아보면 감사로밖에 드릴 게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 시인은 우리의 손을 이끌며,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하고 인도한다. 그 하나님이 전쟁을 쉬게 하셨다. 우리를 공격하는 활을 꺾으셨다. 저들의 위협적인 창을 끊으셨다. 그 수레를 불사르셨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고통에서도 돌아보면 은혜뿐이다. ‘와서, 볼지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

 

반드시 우리를 괴롭히던 것들을 물리치신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우리는 가만히 있어 그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증인들이다. 오늘 시인은 이를 강조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곧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11).”

 

 

나오는 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138:8).”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하는 말씀이 성경의 증거다.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126:5).” 곧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흘린 눈물을 주께서 보상하실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138:8).” 그러할 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증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다시 한 번 되뇌며 말씀을 확신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그게 어느 정도인가?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2-3).”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