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8편 / 우리가 시온이다

전봉석 2021. 4. 2. 14:31

 

210404 주일

 

시편 48편

우리가 시온이다

 

 

들어가는 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그리 고상한 것으로가 아니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와 안전과 건강 때문이다. 이에 모든 것을 누렸던 솔로몬은 인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일컬음을 받는 다윗도, 믿음의 정수를 보여준 바울도 다를 게 없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 55:5).” 다윗은 그런 자신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하였고, 바울은 죽을 지경에 놓인 사랑하는 제자 에바브로가 살아나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 2:27).” 그렇듯 우리의 ‘근심 위에 근심’을 더하는 것이 인생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예외는 없다.

 

이러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예수님은 비록 염려가 없을 수는 없으나 미루고 묶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 ‘먼저와 나중’의 원리다. 무슨 일에서든지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면 우리의 염려는 자연적으로 뒤로 밀린다. 이에 그럴 수 있는 근거는 세 가지다.

 

첫째,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 곧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시며,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의 존재감을 일깨우신다.

 

두 번째,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 즉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을 벌써 다 아신다’는 것이다.

 

세 번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그러니까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을 구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나도 남김없이 더하여주신다는 것이다.

 

 

- 흔들리지 않는 나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우리 인생의 문제를 먼저 언급한 까닭은 오늘 시편의 말씀이 제시하는 시온의 목적을 더하여주기 때문이다. 앞서 이를 알고 있었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였다. 고난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한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즉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곧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자유함이라고 하였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우리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자유하다. 이것에도 저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이것이 오늘 시편의 찬송이다. 시온의 노래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가졌다.

 

 

-본문 이해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오늘 시의 정황은 역대하 20장이다. 여호사밧 시대에 주변국들인 모압과 암몬과 마온이 연합하여 공격하여 들어왔다. 전쟁은 모든 고난의 집약이다. 이때 우리의 피난처,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시 48:1-3절). 우리 하나님이 거하심으로 그곳은 모든 공격을 막으신다(4-8). 우리가 염려할 게 전혀 없는 곳이 바로 시온이다(9-10). 오늘 날 우리의 교회며 주의 영이 임재하시는 우리 자신들이다(11-14절).

 

역대하에 보면 저들은 어려운 처지에서 주의 성소를 떠올린다.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8-9).” 곧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교회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을 감당할 수 없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12).” 그럴 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15).” 이 얼마나 귀하고 황송하며 감사한 일인가? 도대체 우리가 뭐라고…!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17).” 여기서 두 가지, 첫째! 주가 싸우실 것이다. 둘째! 우리는 당당히 맞서 나갈 뿐이다. 덧붙여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 여기서도 두 가지, 첫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 둘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 그렇게 ‘내 말을 들을지어다!’ 하심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만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결말은,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27).” 우리의 궁극의 시온에서 우리는 즐거이 찬송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김은 여호와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고로 오늘을 사는 동안 우리는 시온에서의 자유를 연마하며 시온으로서의 자격을 배양해야 한다.

 

1연(1-3절) 시온은 하나님의 장소다.

 

1) 시온은 은혜의 결과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2)”

 

‘하나님의 은혜’ 하면 다소 막연하다. 이 은혜가 충만하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경험치가 없다. 이를 바울은 건축에서 사용하는 측량 용어로 설명하였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 즉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원은 ‘은혜 충만’의 정점이다. 우리 죄가 아무리 넓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넓다. 우리 죄가 아무리 길고 오래 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길다. 우리 죄의 교만이 아무리 높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높다. 우리 죄악이 아무리 깊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 145:3).”

 

2) 시온은 우리 믿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3).”

 

이 땅의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주를 찬송하는 시온의 예표다. 주의 피 값으로 사셨다. 이 교회는 그 어떤 외형적인 것으로 영광을 표현할 수 없다.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14).” 곧 우리의 화려함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주의 영화로 덧입혀진 것만 못하다. 우리로 의롭다하심은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하시는 의다. 그런 우리는 개개인이 교회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우리가 가장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이다. 이러한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가 함께 계신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2연(4-8절) 악한 세력으로부터 시온을 보호하신다.

 

1) 시온을 공격하는 원수를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4-6).”

 

교회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세상 그 어떤 권세 잡은 왕들도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할 수 없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 2:10).”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보잘것없이 여긴다 해도 우리는 주의 성전으로 이미 손색이 없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2) 교회는 전략적으로 이 땅에서의 요새다.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8).”

 

그런데 교회가 점점 심리학적 이해와 그 정도의 역할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곧 ‘사람들의 쉼터’로 전락되었고,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정도로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 앞서도 보았듯이 교회는 첫째도 말씀이고, 둘째도 말씀이다.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행함으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3연(9-10절) 하나님은 시온을 안전히 보호하신다.

 

1) 교회에서만이 주의 인자하심은 실현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9).”

 

그저 좋은 말을 듣고자 하여 모인 게 아니다. 유익한 시간을 나누고자 하여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먼저는 우리 안의 믿음이 증거이고, 다음은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이를 증명한다. 곧 주의 인자하심을 바란다는 것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를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은혜를 받은 자이다.

 

2) 우리가 시온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10).”

 

하나님의 전으로 우리 몸은 거룩하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의 열심은 자신을 돌보고 경건을 도모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주의 전을 사모한다 함은 우리 안에 주가 거하심을 일상에서 함께 동행함으로 증명한다. 그리하여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다시 한 번 결론을 말하면, 우리는 주의 전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곧 시온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이를 위해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그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체험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59:16).”

 

4연(11-14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온전한 기쁨이다.

 

1)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된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11).”

 

주를 경외하는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를 경외하는 우리는 경탄과 환호로 주의 심판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그러므로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하는 말씀을 붙든다.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 하신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다.

 

2) 심판의 날은 우리의 축복의 날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곧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우리가 이처럼 당당하고 스스럼없는 것은 우리의 의로 인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이다. 이를 믿음으로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늘 시인은 이를 노래하는 것이다.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시 48:12-13).” 즉 자신을 살펴 하나님이 거하시는 궁전으로 후대에 증거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9).” 오늘도 우리가 사는 목적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나오는 말

 

우리의 가장 안정한 장소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우리들 자신이다. 그 시온은 하나님이 지키신다. 악으로부터 막아주신다. 우리들로 하여금 시온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찬송하게 하신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그러할 때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 3:6).” 곧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