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47편 / 경외함에 대하여

전봉석 2021. 3. 19. 09:54

 

210321 주일

 

 

시편 47편

경외함에 대하여

 

 

들어가는 말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불난 집에서 내부 구조나 가구 배치를 놓고 씨름하는 일은 어리석다. 임박한 진노 앞에서 조금만 더, 하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것은 헛되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요한은 공공연하게 그러한 자들을 독사의 자식으로 규정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엄과 위엄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들이 복 있는 사람인 것은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경외함이다. 경외함은 두려움 그 이상의 엄위다. 엄위는 존재의 가치다. 대통령이 되면 존엄이 부여되는 것과 같다.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은 이러한 존귀를 스스로 잃어간다. 사교와 친목 장소가 되고, 복음은 심리적인 안정과 삶의 위로로 전락하였다. 이에 오늘 시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누구의 말씀인지, 그에 따른 우리의 잃어버린 경외심에 경각심을 더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곧 오늘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하다못해 노후준비를 위해 중장년의 시간을 수고하고, 더 좋은 대학과 직장을 얻기 위해 청년들은 입시전쟁과 입사지옥을 견디면서, ‘영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시 47:1-2).”

 

모든 것을 가졌고 누렸던 솔로몬의 지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자신을 보고 깨달으라는 소리다. 저는 뒤늦게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됨을 알았다. 오직 주를 경외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수고가 부질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말해준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 곧 아직 기력이 있고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소리다. 이제 그러고 싶어서 그럴 수 없는 날이 올 거란 소리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는 소리다.

 

예수님은 이르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는 할 수 있을 때 힘써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참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란 말씀이다. 좁은 문은 믿는 자로 사는, 어리석음 같고 번거로움 같은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나중에 이를 후회하며 그때 가서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로 ‘손뼉 치며 즐겁게 주를 찬송하라.’고 한다. 이해가 안 되면 북한 주민을 생각해도 좋다. 다만 저들은 일시적이고 썩어질 것을 손뼉 치고 우리는 영원하신 전능자를 찬송한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살게 하신 분이시다. 저는 어떤 분이신가? 할 수 없는 게 없는 이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우리 안에 슬픔이 가실 날이 없지만 주의 능한 팔로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 저는 누구신가?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 보좌에 앉게 하시는 이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저는 누구신가? 나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하시는 이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저는 누구신가? 어제도 오늘도, 날마다 나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분이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68:19).”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만홀히 여긴다는 것은 ‘한만하고 소홀히 여긴다’는 것으로, 한만하다는 것은 되는대로 내버려두며 한가하고 느긋하게 군다는 소리다. 노아의 때나 소돔과 고모라 때에도 그러했다. 늘 듣는 소리라 별로 감흥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진단해야 한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 곧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공경하지 않는 세대다. 저마다 ‘자기 문제’에 빠졌다. 다들 ‘내가 알아서 해!’ 하며 튕겨나간다. 하지만 ‘혼자만의 문제란 없다.’

 

영화 <바벨>의 이야기다. 일본의 한 가정에서 귀머거리요 벙어리인 딸을 낳은 여자가 자살을 했다. 남자는 아내를 잃고 혼자 아이를 키우다, 모로코 외곽 어느 산간지역으로 사냥을 갔다. 그때 저는 자신이 사용하던 총을 현지인 가이드에게 선물로 주고 돌아왔다. 현지인은 그 총을 이웃에게 팔았다. 이웃은 염소를 치는 가정인데, 가장은 어린 두 아들에게 염소를 치며 자칼을 쫓겨나 잡을 수 있도록 그 총을 주었다. 두 소년은 그 총이 얼마나 멀리까지 날아가는지, 호기심에 멀리서 달려오는 광광버스를 향해 총을 쐈다. 순간 아무런 기척이 없자, 총의 성능을 미덥잖아하며 돌아섰다. 실은 버스 창가에 기대 잠들었던 미국인 부부의 아내가 어깨에 총을 맞았다. 난데없이 벌어진 일로 저들 부부는 귀국 날짜를 맞출 수 없었다. 그러느라 그들 집에서 두 아이를 돌보는 멕시코인 유모는 아들의 결혼식 날짜를 미룰 수 없어 두 아이를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 거기에서 아이들을 잃고, 쫓기고… 일본인 가정의 벙어리 소녀는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총을 쏜 두 소년은 테러 운운하는 미국과 모로코 양국의 마찰로 급기야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이처럼 얽히고설키는 한 개인의 일은 결코 ‘혼자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자살 생존자라는 표현이 있다. 자살한 자의 남겨진 가족들을 일컫는 말이다. 저들은 평생을 트라우마와 싸우며 생존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온 우주의 질서를 잡으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우여곡절을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주의 은혜를 바란다. 우리에게 우연한 일이 하나님으로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시 47:3-4).”

 

야곱은 우리의 모형이다. 저는 ‘엄연하고 분명한 하나님’을 믿었다. 저의 하나님은 두루뭉술한 범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온 우주에 깃들었다는 다원적인 신도 아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날 때 저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세운다. 그때 삼촌 라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다. 한데 저 둘의 하나님은 다르다.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이어서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였다(창 31:51-53). 라반의 하나님은 보편적인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은 ‘이삭이 경외하는 이’시다.

 

그 차이를 오늘 시편은 거듭 반복한다. ‘우리에게’, ‘우리 발아래에’, ‘우리를 위하여’ 하면서 ‘곧 야곱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지칭한다. 바로 그 한 분, 느헤미야는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하고 그 대상을 분명히 지칭하였다.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욥기에서는 우리를 돋우어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 하는 것으로 분명히 하였다. 곧 우리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시다. 모든 것의 중심이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5-6).”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3).” 이것이 우리의 거룩이다. 바로 ‘그’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시 47:5-6).”

 

시인이 연거푸 강조하는 찬송이란, 숨길 수 없는 기쁨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같이 나누었던 시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46:1).” 이를 아는 자는 자랑하게 돼 있다. 이를 알면 알수록 두려움도 같이 온다. 잃을까봐 두렵고, 더 차지하지 못할까 봐도 두렵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더욱 거룩히 하고자 하는 경외심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사랑 받고 싶은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그러나 부정적인 두려움은 그리하여 부인하고 거부함으로 스스로 완고하여진다. 그런 자의 결국은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저들 스스로 부정하고 믿지 않는 말씀으로 인해서 스스로 걸려 넘어진다.

 

아, 우리는 주 앞에 설 때 아뢰게 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께서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일까? 주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두렵고 떨리게 하며 또한 감사하게 한다. 감사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가 그렇듯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4).”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시 47:7-9).”

 

우리는 주 앞에 서면 몸 둘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대마다 주를 멀리하고 부정하는 무리들이 더 많았으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이 온 자연의 섭리를 보고 우주의 운행을 가만히 살펴도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알 텐데….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이가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되심 앞에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이는 마땅한 일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본분이다.

 

곧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죄를 두고 죄사함을 선언하실 때, 그 앞에서 우리는 한 게 없어서 엎드려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 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가? 너무 좋아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경외함이다.

 

 

나오는 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주를 경외함으로 우리가 누리는 복을 두 가지로 축약하면 하나는 치료함을 받는 것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이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주의 뜻 안에서 모두 영광스러운 일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주를 경외함으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8).” 곧 우리 영혼이 주를 바라고 온전히 주를 의지하며 두려워할 줄 알게 된 것이 이미 치료다.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상급이다. 다른 더 나은 보상도 치료도 필요하지 않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만 있으면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는 것과 같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이것이 우리의 거룩이다. 경외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오늘날 아무렇지 않게 욕설이나 맹세에 주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레 20:3).”

 

오늘 시편의 찬송처럼 우리는 주를 높이고,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손뼉치고 즐거워하는 것, 그럴 수 있는 것이 영원한 복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 4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