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선한 목자라

전봉석 2021. 3. 18. 06:0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4-15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1-2

 

 

주를 경외함이란 양이 목자를 알듯 내가 주를 아는 일이다. 그에 따른 복이 있다. 먼저는 치료하심이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다음으로는 상급이 기다린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8).” 나의 영혼이 주를 바라고 온전히 주를 두려워할 줄 알게 된 것이 치료이고, 주님으로 만족하며 주만 의지함이 상이다. 이에 우리는 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저를 만홀히 여기지 않는다. 만홀하다는 것은 한만하게 소홀하게 여긴다는 것인데, 한만하다는 것은 느긋하니 한가롭게 군다는 소리다. 이에 우리는 엄연히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여전히 거기에 머물고 그들과 함께 하기를 즐긴다면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오늘 예수님은 그 차이를 분명히 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이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고백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한 구별됨은 찬양으로 나타난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찬송은 저로 충만한 것이다. 마치 입만 열면 그 마음에 든 것을 말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입에서도 그와 같은 열매를 걷는다. 그런 자가 어찌 주를 만홀히 여기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겠나?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욕설이나 한탄, 놀람에 주의 이름을 갖다 붙이거나 함부로 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이다. 그러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레 20:3).”

 

이와 같은 말씀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게 정상이다. 혹시 나는 어떠한가? 하고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은 막연한 느낌으로 그치지 않는다. 반드시 <경배와 섬김>으로 드러난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7).” 이는 떨리는 일이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2:11).” 하다못해 팬이 열광하는 연예인을 만나거나 존경하는 누구를 마주할 때 울고 불고 떨리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데… 찬양은 경외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나의 입에서 나의 생에 함께 하신 주의 행적을 말하고자 함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기웃거리며 다른 도울 자를 찾는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에 오늘 시편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3-4).

 

이 얼마나 허망하고 착잡한 일이던가? 나는 또 얼마나 사람을 의지하고 사랑을 구애하며 여기저기 굽실거리며 살았는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 12:28).”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29).”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었다. 그리하여 치료하고 상급을 더하신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하나님은 나의 경배의 대상이며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께서 내 안에 임재하신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합심함으로 기도하는 것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목사가 되고 가장 책임감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 기도다. 기도 할게, 기도해주세요, 하는 말이나 부탁을 자주 듣는데 이를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여기저기에 메모를 해둔다. 자꾸 생각하며 저의 일을 떠올린다. 이것이 경배와 섬김이다. 하나님은 이를 요구하신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거리감이 느껴질 때 그러한 모습이 옹졸하고 옹색한 것 같으나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동시에 질투심도 발동을 하는 것이다. 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한다는데 느긋하고 아무렇지 않은 사랑은 없다. 좋아하는 것이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수 있으나 좋은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이때의 두려움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의 표현이다. 자꾸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간다. 결코 함부로 느긋하거나 여유로울 수 없다. 방심하지 않는다. 나답과 아비후가 명하지도 않은 불로 하나님 앞에 분향하다 하늘에서 불이 쏟아져 죽었다(레 10:1-3). 함부로 제사장직을 수행하던 엘리의 두 아들이 블레셋의 칼에 한 날 한 시에 죽었다(삼상 4:11). 웃사가 함부로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댔다가 죽었다(대상 13:9-10).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가 교회의 일에 거짓을 꾀하다 같은 날에 즉사했다(행 5:1).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경배하고 섬기는 일이란 결코 만홀히 여길 문제가 아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멈칫,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알아듣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요 10:30-31).” 저들은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 그러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34-35).” 다시 말해 우리는 신이다.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그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36).” 곧 우리 안의 두려움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함이다. 성경을 묵상하고 이를 의지하며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은 그래서다. 경외함이란 곧 그의 말씀으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9-10).”

 

우리가 흔히 성경공부를 한다고 할 때, 왜 더 성경을 알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경외하는 도’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확실하고 의롭고 정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달다. 아주 조금은, 이제야 알 것 같다. 성경을 찾아보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동안 주의 영이 계시한다. 열어 보이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더더 거룩한 이의 묵상이나 설교를 찾아본다. 존 번연의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항상 곁에 두고 살핀다. 오스왈드 챔버스나 에즈워드의 묵상을 따라간다. 저들이 만나고 늘 거하였던 주의 품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기까지 한다. 내 안에 이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은 가령 저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말씀을 자주 찾고 늘 그것을 인용하여 쓴 책을 점점 더 선호한다. 요즘은 종종 유튜브에서 누구의 설교를 들을 때도 성경을 성경으로, 말씀을 말씀으로 이어가지 않는 설교에는 동감하지 못한다. 허튼 예시나 자기 이야기가 늘어지는 설교에서는 더 듣지 못하고 끊기도 한다. 말씀으로, 말씀으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가끔은 누가 내 이 묵상글을 두둔하며 책을 내자 어쩌자 할 때 정중히 거절하는 이유는 내 글이 아니다. 대부분이 성경이고 누구의 설교였고 어느 책의 내용이다. 그야말로 표절이고 베껴 쓴 것이고 따라하는 것이다. 점점 더 줄이기는 하지만, 종종 들어가는 내 이야기는 허접하고 적용의 의미이다. 나는 세례 요한의 고백을 사랑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그야말로 나는 저들의 고백을 흉내라도 내면서 양떼의 뒤를 따라가는 것으로도 복되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 일이 즐겁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누가 무슨 일로 물으면 나는 이처럼 글쓰기를 권하기도 한다. 우리 아픈 아이는 성경을 옮겨 적기라도 한다. 천천히 또박또박, 하고 여러 번 강조해도 그저 옮겨 적기만 하는데, 나는 괜찮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의 이 글쓰기와 이 시간을 그러므로 내가 주도하는 것이겠나? 이 좋고 또 좋음을 그저 단순히 나의 만족으로만 여길 수 있겠나?

 

하필 글로 오셨다. 말씀으로 임하셨다. 성경으로 주셨다. 거론의 여지가 없게끔 수학 공식으로나 어떤 귀한 형체로 남기지 않으시고 왜 하필 말로다 기록하신 것일까? 이는 평생에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읽고 되뇌어 쓰고 묵상할 때마다 의미는 새롭게 열리고 확장한다. 이는 곧 계시다. 열어 보이시는 세계가 그때마다 다르다. 요즘은 새로 책을 주문하는 횟수보다 다시 읽는 경우가 더 많다. 몇 년 전에 읽을 때와 오늘에서 새로 읽을 때의 그 세계가 다르다. 말씀을 경외함이란 그와 같은 배움으로 즐거움을 더한다. 이를 가르치라(신 6:1). 평생을(2) 듣고 삼가 행하라(3). 이는 곧 여호와를 사랑함이다(5). 자꾸 마음에 새기게 된다(6). 손목에 기호로도 삼는다(8). 뭘 하든 기준이 뚜렷한 것이다. 이를 미간에 새기고 문지방에도 붙이고 문설주에도 바른다. 생활 곧 자체가 말씀으로다. 이렇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그래서 더욱 조심한다(신 6:12).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나는 좋다(15). 만약에 내가 다른 길로 가도 시큰둥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가만히 내버려두신다면 그게 더 슬픈 일이다. 반대로 내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 언급했던 믿음의 사람들보다 더한층 사랑하심을 받고 싶은데, 그럴 자격이나 실력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늘 조바심을 낸다. 그러는 내가 가끔은 웃기지만 서글프고 속상하기도 하다.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아니 저들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늘 나는 내 몸이 먼저고 내 문제가 먼저라, 기도하다보면 온통 내 요구에 시달리다 송구하기만 하니. 그래도 주가 나를 사랑하심이 나는 그저 감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욱 주가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일을 행하고 싶은데. 이는 주를 경외함으로 누리는 복이었다(18-19).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24).” 그것으로 나를 의롭다 하신다.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25).”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내게는 복이었다. 내가 주를 따라가는 것은 저는 나의 목자시고 나는 저의 양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6).” 그러는 사람을 알고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8-9).” 고로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6: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