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전봉석 2021. 3. 31. 06: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2:2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1, 9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날마다의 호흡과 같다. 무시로 아뢰며 고하는 대화이고 감사와 경배로 되뇌는 메아리다. 필요할 때만 도움이 간절할 때에야 비로소 부르는 이름이 아니다. 그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안도하고 위로를 얻는다(행 2:21). 이에 주를 부르는 표본이 오늘의 시편인 것 같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순간마다 이를 체험하며 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고상한 삶은 없다. 그렇게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하는 삶으로 더해지는 날들 가운데,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는 탄성이 입에 배고 마음에 가득하기를(시 8:1, 9).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저를 경외함이다. 모든 주체요,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더하시는 은혜는 인자하심을 바라고 소망하게 한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보이지 않는 중에도 본다. 믿음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이를 주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47:11).” 전에 언제 시를 쓰는 친구가 자신은 스물네 시간 무엇을 하든 시를 생각한다고 했었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순간 시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똥을 싸고 밥을 먹고 사랑을 하면서도 시를 생각한다고 말이다. 웃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범사의 일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를 수시로 음미하고 주와 교제함이 은혜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28).” 즉 범사에 주를 의지하고 아뢰고 고하는 삶이란 저절로 악을 멀리하고 자신의 악함을 혐오하게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결코 인위적으로 그리 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를 머리로나 이론으로 알면 이보다 더 막중한 사명은 없다. 도무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같고, 날마다 밀린 숙제인 것만 같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란 ‘범사에’ 주를 바랄 때 자연적으로 내 안에 드는 마음이다. 이에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무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나로 의롭다 하심이 나의 어떤 행위로가 아니어서 말이다. 전에는 이를 주장하고 드러내며 ‘내가 뭘?’ 하는 심사로 주의 말씀이 어렵기만 하였는데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하고 천만다행한 일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이 또한 내가 내 의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리 하게 하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족하였다.

 

스스로 자족하면 신념이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 하나님의 의가 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때의 두려움이 주를 경외함이다. 나로서는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낄 때 우리 안의 경건한 두려움은 더욱 주만 바라게 한다. 그것이 더러는 고통으로다. 나의 육신이 연약함이 아니면 매순간 내가 주를 얼마나 바라고 의지하겠나? 전에는 내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만큼 몸이 견딜만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으로 내 의지가 투철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에 따른 무장은 위선이었고 나의 가장 확실한 마음은 나 자신까지도 속이는 거짓 만족함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나의 약함이 주를 바라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었으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설마 크게 기뻐하기까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는데, 바울의 고백이 진실함을 이제는 확신한다.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더욱 소망하게 하고, 주를 경외하게 함으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그렇듯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위로 하고는 하였다.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둥 너의 약함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라는 둥 하는 소릴 들을 때면 차마 면전에서 욕은 하지 못했지만 돌아설 때마다 억울한 심정이었다. 이를 이제야 누리며 감사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은 종종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나의 약한 데서 강함이 있다. 그렇게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확신한다. 더는 예배를 예배하지 않고, 믿음을 믿음하지도 않는다. 모든 인위적인 것은 우상숭배가 된다. 기도해야 할 것 같아 기도하고, 성경 봐야 할 것 같아 성경보고,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 같아 주를 바라는 것들이 가증하였다. 그 기도는 온통 나의 소원이 전부였고, 성경을 보는 것이 무슨 주술을 외우듯 의무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니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주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을 알겠다. 이를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로 들려주신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6-17).” 어찌 저와 같은 고백이 나의 것이 되겠나? 날마다 죽다니? 다들 살고자 기를 쓰고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가증스럽게 하루하루의 생을 연명하는데, 날마다 자신을 죽임을 단언하여 자랑하다니! 이를 근거로 베드로의 설교에 집중하면,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18-20).”

 

문득 떠오르는 한 친구를 생각하며 저의 변화된 모습으로 이를 확증한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 어니스트처럼 저에게 나는 ‘큰 바위 얼굴을 본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저를 지치게 한다. 아내와 두 아들로 인한 피로감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그 육신의 연약함으로도 감사보다는 원망이 늘 더 가깝다. 한데 전에는 이를 의무감으로 안고 살았다면 이제는 주를 바라고 의뢰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는 방’이 되었다. 자주 연락을 못하고 통화를 하지는 못하지만 저의 고백과 감사가 신비하게도 느껴진다. 이것으로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하시는 말씀은 응한다.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곧 말씀을 의뢰하고 말씀으로 공감한다. 이것이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날마다의 감사가 그저 희한할 따름이다.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피는 주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것이고, 불은 성령으로 이를 깨달아 아는 일이며, 연기로는 날마다 매순간 드려지는 기도로였다. 그러할 때,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오늘 이 억척스럽고 힘에 겨워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때에도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 땅의 모든 가치와 기준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통일되게 하심을 본다.

 

아주 가끔은 서로가 가까우면서 주를 멀리하고 관계없이 살았던 친구들의 변해가는 모습에서 말씀의 증거를 본다. 저들 또한 자신들의 변화가 거듭될수록 나의 증거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는 나의 인위적인 노력으로가 아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저들을 보며 내가 주께 감사하는 것과 같이 저들에게 나의 모습도 그러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선택의 교리로 누가 누구에게 억지로 이루어가는 세계가 아니다. 에베소서 1장이 선택의 교리면 2장은 화해의 교리로 하나님과 우리의 막힌 담이 무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3장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이 나오는 것이었으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

 

전에 친구 동생의 임종을 준비하며 같이 읽고 나누었던 50일간의 여정에서 ‘에베소서’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였다. 내가 여느 성경보다 애착을 갖고 자주 묵상하게 되는 까닭은 주의 사랑을 나보다 더 받은 자가 없다는 확신을 그의 병상에서 같이 읽던 ‘에베소서’에서였다. 이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17).” 이 길을 간다. 문득문득 이 친구를 생각하고 저 친구를 바라보는 것은 저들이 알고 고백하였던 길이 바울이 걸어간 길이었고 오늘 베드로가 들려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를 저보다 더 실감하며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절규하고도 물고기 잡으러 갔던 저에게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저는 잘 안다. 나야말로 번번이 그릇 행하였으나 그때마다 찾아오시더니, 급기야 목사 안수를 두 번째 낙방하고 더는 이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있을 때의 ‘우리의 만남’이었다!

 

주의 사랑은 나의 그 어떤 죄의 넓이보다 넓으시다. 악함으로 그 길이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던 나의 죄의 길이보다 길으시고, ‘이만 하면 됐지?!’ 하는 나의 교만의 높이보다 높으시며, 늘 불신과 원망의 어두운 마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주의 사랑이 더 깊으셨다. 그때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순간으로 찾아오시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말세의 때가 되면 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신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겠나? 이처럼 주를 생각하고 말씀으로 ‘아멘’ 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26-27).” 이와 같은 믿음이 저때에나 이때에나 동일하였다. 이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28).” 도대체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인데 주의 기쁨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성령으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3).”

 

오늘 아침도 이처럼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시고 기쁨을 더하시는 것이어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39).”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사뿐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 오늘도 이를 더하심으로 한 날을 연장하신다. 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이와 같은 찬송이 단지 다윗의 고백으로 그치겠나? 이 아침, 나 또한 주 앞에 앉아 아뢰며 되뇔 수 있으니 감사하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