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전봉석 2021. 4. 2. 06:02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행전 4:19-20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7-18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알 길이 없다. 하나님의 ‘숨은 지혜’를 우리가 어찌 알까? 저마다 자기가 옳다 하고 사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올바른 걸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신뢰하는 것이다. 저들에겐 거리끼는 것이고 저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나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오늘 사도들은 당당히 권세 잡은 자들 앞에서 말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전에는 그처럼 보려 하고 들으려 했던 세상 지혜를 더는 구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사람들의 편견은 무서울 정도로 작동한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13).” 스스로들 갸우뚱하는 것이다. 가진 것도 없고 보이는 것은 처량한 듯하나 우리의 담대함은 만세 전부터 정하여진 것이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그러므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그러니 세상 학문이나 권세로는 알 수 없는 세계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아는 것에 나로 놀라게 하신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서로의 아는 바가 다른 것이다.

 

종종 ‘유한마담’ 같은 신자들을 본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교회에 이름 있는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우쭐한다. 마치 저들이 걸치고 사는 명품 같이 분에 넘치는 살림으로도 자신의 허기를 달래지 못한다. 견주어 서로 비교하고 선행까지도 경쟁한다. 시기와 허영은 영적인 고갈을 의미한다. 우리가 육신의 요구에 굴하며 신앙을 가졌다면 언제든지 육신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하게 하시는 이가 보게도 하시고 듣게도 하셔야 한다. 이는 엄연한 진리로 예수께서 비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러므로 더는 우리의 바람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곧 허영이나 시기는 가장 악착같이 들러붙는 우리의 본성이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언제든 불쑥,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은 어려워져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오늘 시편은 서글픈 목소리로 하나님께 아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보면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것 같고, 오히려 저들이 더 복락을 누리는 것 같다(시 10:1). 분명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지만(!) 간혹 저들을 보다보면 미끄러질 뻔하고 넘어지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왜냐하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1-2, 3).”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 느끼기까지가 하세월이고, 가슴으로도 느낄 수 있겠는데 삶으로 받아들이기가 묘연하기만 한 것이다. 저들은 뭘 해도 잘되는 것 같다. 심지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4-9).”

 

그럴 때면 씁쓸한 마음이 앞서지만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의 일을 따른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결코 천사들을 그리 구원하신 게 아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가 하는 문제만 남았다. 저들의 형통함에 대하여는 더는 마음 상할 것도 이상히 여길 것도 없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안의 또 다른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로 해방하심이다. 이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다. 교회 안의 ‘유한마담’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 안의 속성이기도 하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일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증거가 우리 안에 있고 그것으로 삶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곧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2).” 그러므로 여전히 자신을 치장하고 보이는 것에 연연하며 보여지는 것에 예민하다면, 어딘가 고장이 났거나 처음부터 잘못 딛고 선 게 틀림없다. 시인도 이를 성전에 들어가면서야 알았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부럽지… 당연히 저들이 잘되는 것처럼 우리도 잘되면서 주의 은혜도 충만하였으면 좋겠는데… 본디 우리의 본성이란 게, 있을 땐 있는 것으로 감사할 줄을 모른다. 기어이 잃고 난 뒤에야 있었을 때를 돌아보며 후회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기를, 믿는 사람은 이제 좀 남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우리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의는 저들처럼 분에 넘치게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정리해보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본성으로 씨름할 게 아니라, 그 또한 주께 맡기고 나는 날마다 매순간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더는 바라는 게 없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세상 것에 대하여는 점점 무뎌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의에 민감해져간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8-9).” 아, 말씀 참 깊다. 이와 같은 말씀을 오래 머금고 있다보면 저절로 나의 나 됨으로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그렇게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말도 안 되는 우리 안의 새로운 본성이 깨어난다. 이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저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다. 저의 옷차림이나 누리고 있는 부유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영혼이 처해있는 상황을 안타까워할 줄 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말씀을 알고자 하는 열망은 커져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직업군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공통된 사명이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는 살았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 것으로 연연해하고 있다니!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더는 그런 자신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3:1).” 마치 아이가 자라면서 부끄러움도 알아가는 것처럼 더는 예전의 것으로 견주어 서로를 바라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상급을 향하여 달려가게 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그러니 저들은 어찌 살고 무엇으로 진리를 삼아 떵떵거리며 이 땅에서 누리든지 것도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오직 나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누가 뭐라든지 부르신 이의 뜻을 따라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 이를 알면서 나는 더 이상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고, 두시는 날 동안 온전히 주를 바람으로, 오늘 사도행전의 설왕설래하는 저들의 논쟁에 낄 것도 없다. 나의 특전은 엄연히 나로 굳건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마음을 준비하시고 귀를 기울이게 하심으로 더는 세상으로부터 위협당하지 않게 하심이 나의 특별한 은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