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전봉석 2021. 4. 1. 06:07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행전 3:12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편 9:1

 

 

저마다 주목 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돈이 되고 권력이 된다. 그러느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오늘 말씀은 이에 반기를 든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자신이 행한 놀라운 일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경계한다. 이를 시편의 목소리로 다시 되뇌면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이 모든 일이 주가 행하신 것임을 밝힌다. 사사롭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모든 행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 게 하나도 없었음을 깨닫는다.

 

가령 어제는 몸도 마음도 모처럼 괜찮았다. 불안으로 가슴을 졸이는 일도 없어 숨 쉬기 어려운 경우도 없었고 몸도 적당하여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가뿐하였다. 공기질도 이제 보통만 돼도 살만하여 창문을 열어놓게 된다. 그럴 때면 여기저기 감사할 게 한두 갠가? 그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으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뒤집으면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버려야 한다. 아니면 그에 따른 경중을 스스로 결정하여 ‘그럴 수 있지’ 하는 정도로 여겨지는 것들뿐이다. 성경은 엄연히 이를 바로 잡는다. ‘그럴 수 있는 일’이 ‘그래도 되는 일’은 아니다. 무단횡단을 할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정도’ 거짓을 할 수 있지.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즉 이런저런 허용의 범위가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에 의해 침몰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오랜 시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것이지만, 늘 그러는 아이가 또 그런다! 그런 아이의 특징은 항상 ‘그럴 수 있지’ 하는 항변으로 스스로 되레 억울해한다. 좀 늦을 수 있지,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있지, 하는 식인데 그 범주에는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깔린다.

 

그리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눅 4:17-18).” 누구만 그런 게 아니라 다 일치하여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19-20).” 이는 결코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기는 범주는 어느새 ‘그래도 된다’는 것이 되고, 마땅히 여론이 조성되면 ‘그래야 한다’는 것으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나는 실제 여론조사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제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가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 한다(21). 이는 주의 뜻으로 사는 길이다. 자칫 “성령을 소멸”할 수 있다(19). 그러므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22). 그런데 그게 어디 그런가? 스스로 허용하며 사는 범위가 너무 넓어졌다. 그럴 때만 스스로 약함을 빙자하여 ‘사람이 다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린다. 그래서 말씀은 경건을 강조한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그러다보면 다소 고리타분해지고 저만 의로운 척 하는 것 같고, 괜히 멋쩍어져 면구스럽기 일쑤다. 그러니 서로가 아닌 걸 알면서도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하고, 그럴 수 있는 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외면하게 된다. 범사에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경건이다. 특히 감정으로 은혜를 사모하면 감정의 노예가 된다. 예배를 예배하고 믿음을 믿으면 이는 또한 자신의 우상이 된다.

 

나는 그래서 누구와 통화할 때면 자주 성경 묵상하자, 말씀 붙들자, 말씀으로 힘을 삼자, 하고 되뇐다. 저에게 그리 이르면 너무 막연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이보다 실제는 없다. 감정으로 느끼는 뜨거움이나 감사는 세상 여느 감동으로도 충분하다. 하다못해 드라마를 보면서도 눈물이 흐르고, 그런 걸 은혜로 삼는다면 우스운 일일 텐데… 우리가 삶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누리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말씀뿐이다. 새삼스러운 것으로 감동하고 감격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간증을 삼으면 어느새 자극적인 사람이 된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심지어 찬송가 연주에도 주의를 당부하였다. 가사에 집중하고 그 말씀에 주목해야지, 덧입혀진 멜로디는 어찌됐든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듯 주일 날 예배에 가서 말씀 듣는 것보다 금요철야에 가고 찬양집회에 가는 것이 자신은 더 은혜롭다고 한 말이 그래서 문제다. 주여, 부르짖으며 마음껏 통성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서 적당한 멜로디의 자극적인 선율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인데… 저의 말에 뭐라 해주지 못한 것은, 이상할 정도로 저들만의 고집이 있고 그것을 선호함으로 더욱 바라게 된다. 예배를 예배하지 않도록, 믿음을 믿지 않도록 당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믿음을 스스로 믿으면 신념이 되고 예배를 예배하면 바리새인이 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신앙하는 세상이다. 이를 역으로 바울은 경종을 울린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스스로 ‘그럴 수 있지’ 하는 순간 그 허용의 범주에서 성령은 소멸된다.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게 다 은혜이고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러므로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경계처럼,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한 것이 아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으로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는 주의가 필요하다(행 3:12).

 

감정이란 조울증과 같아서 너무 좋거나 너무 우울하다. 지혜자는 이를 지나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그럼 그냥 될 대로 되라는 것인가? 아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뿐이다. 무엇을 잡든 놓든,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결정적으로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으로는 그 기준을 바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말씀으로다. 말씀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어제 오후에는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시편 48편의 시적 배경이 되는 역대하 20장을 살폈다. 여호사밧 시대에 주변국들의 연합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저들은 오히려 시온을 바라보았다. 즉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당장의 형편은 어지러운데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얼까? 하나님은 아무 데나 어슬렁거리듯 기웃거리시는 분이 아니다. 낮고 천한 구유에서 나시고 혐오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여, 마치 아무 데나 이르시는 줄 안다. 바울은 일러 그러므로 우리 몸이 거룩한 주의 성전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드릴 예배는 엄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감격스러워하고 도로 그 우리에 들어가 싸고 뭉개고 하는 개나 돼지가 아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삼가지 않으면 받은 은혜가 오히려 꼴불견이 되기 십상이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11:22).” 주의 은혜가 귀한 것은 ‘한 성소를 주를 위하여 건축하심이다.’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8-9).”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12).”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오직 주만 바라는 삶으로의 예배다. 그러할 때 주의 놀라우신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15).”

 

오늘 일련의 여러 사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17).” 이와 같은 시적배경을 살피고 시편 48편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일은 놀라웠다. 말씀은 이어서 말씀하였다.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 얼마나 우리 삶에 실제적인지! 누가 말씀을 막연하고 추상적인 언사로 여겨 감정으로나 느끼고 말 것으로 삼겠나? 이를 씹어 먹어야 한다. 삼켜야 한다. 삶으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할 때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27).” 우리가 돌아갈 시온이며, 오늘을 사는 시온으로의 삶이었다.

 

시인은 그렇게 찬양하고 있었다. 우리의 가장 안정한 장소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 시온이다(시 48:1-3). 그 시온을 우리 하나님은 두루 지키시고, 악한 것들로부터 막아내신다(4-8). 오늘을 살면서도 가장 안전한 곳은 시온이다(9-10). 그 시온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11-14). 이렇게 말씀을 찾아보고 뜯어보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한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의 한계를 사랑한다. 어제 오후에는 문득 이와 같은 감격으로도 내가 참 복이 많다, 은혜를 많이 받은 자이다, 하는 생각을 하였다. 마땅히 행할 바 그 이상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이 길을 가게 하는 것이 나의 연약한 육신이요, 어려움이라면 그것까지도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하는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을 입안 가득 머금는다. 곧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