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7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2:6
말씀으로 주와 화목하기를, 이는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시 12:7).” 오늘 시인의 진술과 같이 선택의 교리만큼 화해의 교리도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비열한 인생에서의 구원은 확정되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이를 바로 알고 온전히 그 위에 삶을 지어가는 것이 복되었다. 이는 그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주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심이었다. 그렇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 3:18).” 걸어가는 길이다. 우리를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 이에 느브갓네살이 다니엘을 보고 그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단 4:11-12).”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 이 또한 여러 안 믿는 자들의 눈에 조차, ‘천사의 얼굴’ 같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이 놀라운 모습과 느낌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꾸며 그리 행색을 갖추는 게 아니다. 주변을 압도하고 모든 이를 주목하게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증명하는 가장 단적인 예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놀라운 증거 앞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종종 나는 전에 알지 못하던 권위를 느낀다.
어제도 점심 때 들어와 아들과 같이 식사를 하고 혼자 남았다. 두껍게 입고 창가에 앉아 창을 열고 모처럼 봄비가 내리는 시원한 공기를 쐬며 오스왈드 챔버스의 <전도서 강해>를 다시 펼쳐들고 있었다. 마침 그때 한 친구의 전화가 들어왔다. 아이고, 전목사님! 하면서 저는 넉살좋게 첫 인사를 건네며 말문을 열었다. 대학로에서 누굴 만나 술을 한 잔 하는데 내 얘기가 나왔다며, 뜬금없이 전화를 준 것이다. 워낙에 사람 좋아하고 친구를 찾는 경우라 그러려니 하며 같이 있는 누구의 안부까지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교회는 어딘지, 목회는 계속 하는지, 저는 오랜만에 통화를 할 때마다 생경한 사람처럼 다시 또 묻고는 한다. 나는 편하게 말을 하는데 저는 어려운가, 느낌이 사뭇 조심스러워하는 말투로 말이다. 저의 소식을 접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답답하다. 여전히 교회도 열심이고, 믿는 자로 산다고 살면서도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저의 생활은 늘 부산하여 여러 곳에 발을 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면 어제처럼 불쑥 내 소식을 접하고는 새삼스레 안부를 묻고 또 똑같은 질문을 해대는 것이다. 마치 저의 영혼의 답보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다. 뭐라 진지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좀 보자, 어쩌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를 보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자의 부산스러움을 보는 것 같다. 성령은 일러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종종 내 곁에는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몇 있다. 저들을 보면 그런대로 이도저도 잘되는 것 같다. 저 친구만 봐도 참 사람 좋아한다. 한국에 오면 늘 누구랑 같이 있고, 그러는 자리에서 술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동경이 있는가? 혹은 잃어버린 영혼의 본능에서인가? 잊을만하면 내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는 전에 물었던 것을 또 묻는다. 목회는 하는지, 어디 있는지… 저에게 기도와 말씀이란 사업을 이뤄가는 데 한 수단인 듯하다. 의외로 그렇게 교회를 다니고, 실제 의도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넓히는 이들도 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늘 오랜 여운처럼 남는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이를 들으면 격한 공감을 얻거나 반감을 갖는다. 둘 중에 하나다.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이상하게 오랜 대화가 어렵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다 편의적인 마무리로 끊는다. 욥의 친구인 나발의 입을 빌어 들어보면,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7-8).”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9).” 저의 말이 옳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존재이시다.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10-11).” 다 아신다. 전에 같지 않은 어떤, 마음의 길에 대하여 나는 어찌 서술하기가 조심스럽다. 가령 어제도 참 그 말의 이어짐에 있어 마치 썰물과 밀물이 들고 날 때에 바닷물이 다 덮기까지 골을 타고 흘러들고 쓸려 나가는 것을 느낀다. 우리 믿는 자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이와 같은 마음의 길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누구와는 아주 멀리 또 깊게 골을 따라 흐르는 말이 누구와는 금세 덮여 어디가 길인지 골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지혜서는 각기 그 특징을 갖는데 전도서는 삶에서 그 지혜를 다 누림으로 어떠한가? 깨달음을 묻고, 시편은 그 지혜를 가지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실제를 보여준다. 욥기에서는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발휘되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면 아가서는 그 지혜로 서로 사랑하는 주의 사랑을 체득한다. 잠언은 삶에서의 실질적인 적용이다. 사는 데 따른 실제의 지혜를 격언처럼 엮어두었다. 이를 종합하여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어제 그 친구와는 끊어질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닿지 못하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된다. 선교의 꿈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갔던 이가 하나님이 사업을 하게 하심으로 나름 ‘좋은 일’도 참 많이 하고는 하는데, 그에 반해 자기 좋은 것들도 놓지 못하고 사는 것이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 감히 내가 어찌 저를 뭐라 하겠나만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 그렇지! 오직 주만이 아실 일이고 이루어 가시는 세계일 거여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그저 나는 이처럼 말씀 앞에서 주의 뜻을 묵상할 따름이다. 이래저래 몸도 마음도 여의치 않은 하루였다. 때로 나의 어려움이 나로 지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할 수 있는 정도로 주가 허용하심을 느낀다. 공연히 마음도 이러저러하여 안정제도 여러 번 먹은 날이어서 뭐라 아쉬움도 남지만. 그럼에도 주의 사랑은 한결같으시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 5:9).” 내 어찌 주의 뜻을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나만,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 저 뒤에 숨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깨달아 알 길은 없으나 확신하며 의지하는 마음으로 주를 바람이다. 친구에 대한 주의 계획하심도, 그와 나의 관계도, 나의 나 됨도… 너무 깊이 연연할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 뒤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으심을 나는 이제 안다. 오늘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련의 여러 상황들도 그것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곁에 두시는 이의 사연들도 그렇고 나의 이런저런 상황도 그렇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오늘은 사도들이 교회의 질서를 위해 집사들을 세우고 서로의 역할과 사명을 나누는 데 있어 그 일이 어떠하든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천사의 얼굴’이 있다. 싫든 좋든 감출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이를 앎으로 누구를 대할 때 또는 저의 이런저런 사연 앞에서 나는 먼저 주의 뜻을 헤아린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마음이다.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도 또는 알 수 없는 마음이 앞서 저만치 이끌려가는 것도 실은 우리 안에 성령의 바닷물이 들고 나는 고랑이 있어서이다. 누구와는 더한층 깊고 멀리 내륙 안쪽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누구와는 갯벌 저 얕은 곳에서 끊기는 경우도 있다. 이를 내가 어찌 하랴. 다만 주의 인자하심으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18).” 주의 인자하심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각자 주를 경외함의 정도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시 12:2).” 우리는 온전히 주의 말씀으로만 바랄 뿐,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고로 오늘 우리의 안전은 말씀이 거하시는 증거로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이 빛난다. 그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그리하여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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