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행전 5:32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여전히 죄의 몸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살지만 더는 죄에 종노릇하지 않게 하심을 주의 이름을 부르다 안다. 더욱이 마음이 어렵고 여러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면 더욱이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심을 피부로 느낌으로도 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곁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부름은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특권이었다.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으로 사는 영혼으로 실감하는 일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서로가 기도를 부탁하고 또한 생각나는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새삼스러운 하루였다. 아무리 가벼운 무릎수술이라고는 하나 아내의 부재는 하루 종일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였다. 덕분에 얼마 전부터 미루고 있던 의자 다섯 개를 하나씩 가져다가 세제를 풀어 안장을 빨았다. 시커먼 구정물이 나왔다. 몸을 고단하게 하여 마음을 달랬다.
함께 하게 하신 이에 대하여는 감사를 잃고 살 때가 너무 많다. 남에게서는 금세 느끼는 고마움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왜 그처럼 인색한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항상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것의 부재로부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혼이 그처럼 홀연히 떠나가는 데서 치를 떨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5).”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삽비라도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10).” 그처럼 허망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우리의 영혼인데, 저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짓을 자각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늘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차라리 그럴 바엔 드리지를 말지, 왜 나서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드린다고 드린 것이 얼마를 숨겨 속이는 일에 영혼을 방치한 것일까? 어쩌면 남들 이목 때문이다. 그리고 설마 모르겠지, 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다는 것은 차라리 대놓고 부인하고 부정하는 일보다 간악하다.
내 안에도 이와 같은 설마, 하는 안이함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무심함이 존재한다.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 수시로 딸애가 보내오는 병상에 누운 아내의 모습이 새삼 여러 감사함을 일깨웠던 하루였다. 병원 주차장 차 안에서 잠시 아내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다. 전날에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우리의 기도는 능력이 크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 수시로 누구를 생각하고 오가는 일상에서 저를 생각할 때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일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먼저는 나에게도 역사한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뿐만 아니라,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 누구는 이를 알면서부터 어떨 땐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불쑥 전화를 하여 기도해줘! 하고 말한다. 피식,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서로가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권세를 간졌다. 언제든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 삶을 산다는 것은 기도가 쉼이 없고 말씀을 사모함으로 드러난다. 전에는 읽히지 않고 눈에 안 들어오던 성경이 더욱 더 알고 싶어진다. 누구는 늘 쉬운 성경을 찾았고 뭐라 하면 어렵다, 하며 이를 물리곤 했었다. 명색이 이 땅에서는 박사로서 그 학식을 자랑하면서 말씀 앞에서만 인색하게 군다. 그건 어려운 게 아니라 관심의 문제다. 나는 누가 좋아하는 게임이 어렵다. 나이 들며 치매 예방에 좋다면서 누가 핸드폰으로 하는 게임을 가르쳐주었는데 나는 도무지 그게 뭔 소린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다보면 안다는데 하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듯 성경도 같다. 어렵다, 하는 것은 하기 싫다, 하는 소리를 비틀어서 하는 말이다. 그와 같이 기도란 호흡과 같아서 수시로 아무 때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점점 더 우리의 생각이 한데 모아지는 것을 뜻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0-14).”
나는 바울의 저 말씀을 묵상할 때면 오늘의 자세에 가늠쇠가 되는 것 같다. 알고 가겠나? 누군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하는 결의에 찬 자기 고백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이를 세상 학문으로 설명하고 알려줄 길이 없다. 누구에겐 미련한 짓이고 누구에게는 꺼려지는 일이겠으나 이상하게 이제 나는 사모한다. 그게 된다. 더 많이 깊이 알고 싶고 행하고 싶다. ‘오직 한 일’ 그것을 위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아주 가끔은 그리울 때가 있다. 어제는 혼자 집에 있으면서 누구 생각도 나고 누구 생각도 나서 통화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언제부턴가 대화가 어렵고 하는 말이 다 싱거워진 게 오히려 놀라운 사람도 있다. 죽고 못 살 것처럼 죽이 맞던 사람인데, 저의 부재는 나의 가는 길에 걸림이 되지 않는다. 이제는 다만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같이 생각하고 같은 것을 바라보는 사람과의 대화나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우리는 이제 같이 ‘달려가노라.’ 하는 사도의 증언이 늘 새로운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같이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49).”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휴우, 하고 숨을 몰아쉰다. 좀체 느낄 수 없던 평안이다. 어릴 땐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 괴로웠다. 죽은 자가 살아나다니. 처녀가 성령으로 임신을 하다니. 천국이 그렇다는데? 하나님이 말로 이 모든 천하 만물을 지으셨다는데? 어찌 죽은 이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믿지 않는 일은 믿는 일보다 어려웠다. 안 믿어지니 항상 두려움이 가까이 있었다. 더욱이 영원한 영생의 시간이 무서웠다. 그게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끝도 없이 영원하다는 것을 두고 어릴 때도 종종 생각에 생각을 물다 오금이 저리고는 하였다. 한데 지금은 나의 이해와 납득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믿음을 믿음하지도 않고 때론 그러는 나 자신조차 내보려둔다. 왜냐하면 그러든 어쩌든 나는 속하였다는 사실을, 어쩌다 안다. 내 안의 이와 같은 믿음은 항상 불가사의하다.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행함으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더는 탓하거나 죄책감으로 시달리지도 않는다. 나의 의로는 바람을 한 줌 쥐고 있을 수도 없다. 나의 믿음으로는 조석간으로 변하는 나의 마음조차 붙들어둘 수가 없다. 그저 행할 뿐이다. 가끔은 순 엉터리 같다. 엉성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다. 흉내만 내는 것도 같다. 어제는 그렇게 불안하였는지, 아침 일찍 서둘러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말고 청소를 하고, 서둘러 아내와 딸애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곧이어 아들을 깨워 밥을 차려주고 뒤처리를 하고, 아이들이 앉아 더러워진 의자를 빨고, 오후께는 설교원고를 마무리하고 조금 일찍 돌아와 아무도 없을 때 알코올을 풀어 바닥을 닦고 아들과 둘이 저녁을 차려 먹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가 갔다. 그 기저에는 불안한 마음이 깔려 있었다는 것을 안다. 앎으로 주를 더욱 바랐다.
말씀은 그럴 때면 나를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아, 이 얼마나 좋은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기 위해 은혜를 받자고 말하지 않는다. 받았다는 것을 아는 까닭으로 은혜도 사모할 줄을 아는 것이다. 그것으로 경건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도록 한다. 이 또한 감사할 일인 것을 성경은 일깨우시는 것이다.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를 위시하여 저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주를 섬긴 게 아니라, 그리 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능욕당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고 이를 도리어 기뻐한단 말인가?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누구처럼 순교하는 게 꿈이라는 소릴 감히 입 밖으로 낼 정도의 강심장도 아니다. 다만 오늘 시인의 표현처럼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주의 얼굴을 뵈오리라, 하는 이 확신은 저가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신뢰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럴 수 있었겠구나! 오늘 사도들도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내 안의 믿음에 대해서도 나는 증명할 길이 없다. 머리로도 상식으로도 알려줄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2).”
아,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상황이든지,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자유이겠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하루 이틀 반짝 하던 몸이 하필 또 어제는 그 수선을 피워서 그런지,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앉았다. 이제는 엉덩이가 아프고 허벅지가 뜨거워서 의자에 오래 앉아있지도 못한다. 이런저런 서러움이 욱, 하고 밀려들 때도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하는 사도들의 단호함을 잃지 않기를. 오직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32).” 증인 된 자로 살기를. 그리하여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다른 길 없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오직 주를 바람으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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