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사도행전 12:24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편 18:30
말씀 붙들고 주만 바라는 삶이란 다른 무엇의 어떠함에 대하여도 자유하는 일이다. 이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 18:31).” 하는 오늘 시편의 질문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있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88:4).” 그럴 때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기분은 까부라져 침잠한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69:2).” 그저 월세 얼마에 쩔쩔매며 교회를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나의 기분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이 되게 놓아두신다.
가령 주인이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하며 자신의 사업에 대해, 가정에 대해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럴 때면 내가 아는 나와 저이가 아는 나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저쪽 사무실을 내보내고 5월 중순에 대대적인 공사를 할 것이라며, 도면까지 그려가면서 소상히 알려준다. 듣다보니 내 자리도 빼면 두 개 더 사무실을 낼 수 있겠다 싶은데 희한하게 우리 교회는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기로 계획을 세워왔다. 우리가 나가야 하나, 어딜 좀 알아봐야 하나, 하는 이런저런 염려가 전에 잠깐 언질을 듣고부터 간간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듣다보니 나가지 말라는 것이고, 오히려 이쪽은 복도도 건드리지 않을 계획이라며 이런저런 설명을 더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우울함이나 낙망함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별개의 세상을 포석하신다. 거짓말처럼 어떻게 이쪽은 그대로 손도 안 될 계획을 세웠을까? 사무실을 쪼개 무려 스무 실 가까운 소호사무실을 계획하면서…. 새삼 내가 들아 앉아 있는 곳이 주의 전임을 다시 인식하였다. 나의 염려나 기분과는 별개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셨다. 그렇게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47:2).”
공사비가 최소 1억은 든다는데, 그러니 기이할밖에. 월세를 더 올린다는 소릴까? 계약기간이 훨씬 지나서 언제든 나가달라 하면 나가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더 있으라 하는 게 말이 되나? 저의 도면으로 보면 하는 길에 우리 쪽까지 손을 대면 훨씬 이득일 텐데도. 며칠 나 혼자 안달을 부리며 마음을 졸였던 일이 새삼스러운 게 되었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낙심은 하나님을 망각하거나 오해하는 데서 온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미덥지 않은 데 따른 자기 살 궁리다. 그런데 오히려 안 믿는 이가 우리더러 그냥 더 계시라 하고,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보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그저 나는 희한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 깊음, 한 높음’ 더 깊고 높으시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저가 날 보고 불쌍히 여겨 그러하겠나? 자기 말마따나 사업가라. 손해 보는 일은 안 한다. 그러면서 그와 같이 도면을 그려 설명하면서 굳이 내게 그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조화이다.
우리를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신다. 교회를 하면서 목사가 되고는 나는 이처럼 희한하고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데 놀라고는 한다. 누구에게 설명해도 나의 이 감동은 오롯이 내 것인 모양이다. 희한하지 않나? 저의 도면까지 내가 어찌 그려 보여줄 수는 없어도 우리 교회도 내보내고 손대는 김에 이쪽도 건드리면 최소한 두 개에서 네 개의 개인사무실을 새로 뽑을 수 있었다! 그것까지 설명하고서도 이쪽, 교회 쪽으로는 일체 손을 대지 않겠다고 하니 오히려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 그러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결론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다. 누구와 통화하면서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모든 게 서툰 자신을 타박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모든 게 다 처음이다. 오십대 중반을 살고 있는 나도 이 나이는 처음이다. 우리 애들은 다 컸다고 하나 서른 살 자식들을 두고 있는 일도 처음이다. 어떨 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관여하고 아는 체를 해야 하는지. 그냥 나 몰라라 해야 하는지… 우리는 늘 오늘이 처음이다. 서툴기는 마찬가지고 또 똑같은 일로 기분은 가라앉고 깊은 수렁에나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감이 들 때도 있다. 유난히 주의 길을 간다고 하면 할수록 이상한 쇠약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돈이 좀 여유가 있었으면, 건강이 좀 여차해서 다른 뭐라도 척척해낼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남들처럼, 여느 교회처럼 그럴듯하게 뭔가를 좀 하며 보람도 느끼고 남들의 주목도 받을 텐데, 싶은…. 하나님은 그런 나의 기분을 너그럽게 내버려두심으로 이와 같은 더욱 내밀하신 손길을 체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 49:15).”
가히 짐작도 하지 못한 일이어서, 어제 아침에는 그저 어리둥절하였다. 주인이 내게 와 왜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하고 자신의 사업상 계획을 보고 하듯 말하는 것일까? “… 원하건대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에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과 태음이 자라게 하는 선물과 옛 산의 좋은 산물과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과 땅의 선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신 33:13-16).”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교회였다. 나는 가끔 그와 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처럼 걱정을 한다. 그뿐인가? 나는 엄연히 주가 세우신 주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자꾸 이 사실을 잊고 스스로 빙충맞다고 여긴다. 이는 모두 불신앙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자세였으니 낙망하고 실의에 젖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 복은 영원하다는 것을 자주 잃어버린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27).”
문득 주가 더하시는 날과 나를 이곳에 놓아두시는 목적과 그 이유가 새삼스러웠다. 아, 이곳이 교회였지! 아, 나는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였지! 이를 까먹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이 생각하고 염려하면 내 안의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일을 범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라고 여기면, 내 자식들이고 생각하면, 내가 사는 집이라고 한정하면 그야말로 내가 알아서 짊어져야 하는 인생이 된다. 부디 언제쯤 나는 좀 의연할 수 있을까? 자라가기는 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그렇게 또 한 번 주 앞에 송구하였다. 민망하기도 하고 계면쩍어 머리를 긁적거리는 하루였다. 혼자 괜히 속 끓이며 그것도 모자라고 돈도 없고, 건강도 여의치 않고, 별의 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몰아세우며 침울하였는데… 그러는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계셨다. 그러니 참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일보다 더 희한하고 놀랍고 기이한 생은 없는 것 같다. 때를 따라 돕는 손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와 같은 상황 앞에 그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따름이다.
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주의 권능으로 놓여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주를 바라고 주를 삶으로 체휼한다. 오늘 본문에서 그 시대의 저들의 삶이 오늘의 나의 사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데 놀란다. 주께서 하신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행 12:24).”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 맞다, 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이에 우리는 기도하고,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전하여 말씀이 말씀 되심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 그러므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이보다 더 실감나는 사랑은 없다. 그렇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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