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5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시편 41:11
죄의 유익이라면 철저하게 나를 통회하게 한다. 그로 인하여 주께서 나를 붙드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쓸모가 없음을 깨닫는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자신 앞에 몸서리친다. 그러나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시 41:11).” 그러한 나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그러하지 않으면 나는 구제불능이다. 마음은 저 혼자 앞서고 들끓다 낙심하기 일쑤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다가 역시나 하고 실망하는 일은 목사가 되고 난 뒤 다반사인 것 같다. 이런 속내는 아무에게도 내색할 수 없고 공연히 서러운 생각은 저 혼자 끙끙 앓는 소릴 낸다. 나의 이런 특징, 죄의 속성을 잘 알았다고 해도 내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버려지지도 않아서 또 그러기를 되풀이 한다. 오늘 바울의 한탄이 나의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곧 죄의 끈질기고 줄기찬 요구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내 안에 드러나는 여러 생각과 마음이 저 혼자 씰룩거리며 골을 부릴 때는 그야말로 감당이 안 된다. 작은 일에 자존심이 상하고 공연히 무시당한 것 같아 저 혼자 배알이 꼴린다. 그럼 그럴수록 나는 어찌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이 구제될 수 있다는 데 다다른다. 곧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 그럴 때 나는 협소하고 부족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의 본질에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도 선명해진다. 어찌 이런 나를 사랑하셨을까?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 3:17).” 주가 아니시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데 안도하게 된다. 그렇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
이를 아는 데는 나의 속에 내재하는 죄의 본질과 마주해야 한다. 곧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17).” 그러니까 겉으로의 나는 실제의 나와 다르다. 내 안에 온갖 더러운 게 나를 주장하려 하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감당이 안 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상하게 이는 도덕적이고 예의바름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땅에 살면서 땅에 있는 지체로 어찌 그 지체를 죽일 수 있을까? 죽지 않는 나는 내 안의 죄성을 동원하여 나를 지배하려 든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주의 마음으로 마주하고 대하고 처신해야 한다. 아니면 또 금세 골이 난 사람처럼 뚱하고 어떤 불의한 생각이 나를 조종하려 든다.
곧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 원리, 죄의 무서운 속성을 알면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내 안의 실망과 공연한 서러움이 나로 하여금 주의 뜻을 흐리고 모든 걸 파국으로 몰아가려는 것을 느낀다. 주일 예배 후 공연히 마음은 어려웠다. 모처럼 공기가 좋아 아내와 산책을 하며 걷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나 혼자 뚱하니 시무룩하게 굴던 오후였다. 어떨 땐 내가 나보다 어려운 게 없다. 뭘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아, 이게 나의 속성이고 죄의 본질이구나! 바울은 왜 이 문제로 씨름하였는지 알겠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나로서는 나를, 내 안의 죄성을 다스릴 수 없다.
그 악의 구체적인 모양은 몸의 행실로 발산한다. 말로 찌르고 몸으로 행사한다. 이는 곧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나의 행위로 행함이 아니고 주의 마음으로 그 다스림을 행하는 일이었다. 아직 멀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알고 눌러앉을 것인지 그래서 더 열심으로 달려갈 것인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가끔은 이런 나의 어쩔 수 없음을 털어놓고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고 싶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 그럴 수 있는 상대조차 멀리하게 하심으로 주께로만 서게 하신다. 곧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나의 어쩔 수 없음이 나로 하여금 주께로만 엎드리게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나의 고약한 체질과 생각은 나로 하여금 나의 한계만 알게 하고,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보화를 발견하게 한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그래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 달려갈 뿐이다. 나에게 또 실망하고 내 생각과 다른 현실에 또 낙심하고 혹시나, 하고 기대하였던 마음에 대해서도 훌훌 털어버리고, 묵묵히 앞만 보고 나아가는 일이었다.
그 보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게 우리 안에 쏟아놓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은 도리어 주의 충만하신 은혜 앞에 감복하게 할 따름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어쩔 수 없는 한계와의 공존이다. 그런 내게 사랑을 나타내신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조금 어이없는 상황에서의 깨달음이기는 한데, 나의 한계에서 나의 가능성을 느낀다. 나의 죄성에서 나를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그게 곧 지옥 중에 거하는 나를 건지시기 위한 것이었다.
곧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 문제의 심각성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것이 나의 실체다. 어쩌면 나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는 데서 어떤 기대, 한 성도의 구원을 바라고는 한다. 누구, 저가 주 앞에 나아오기를 나의 성취감을 위해서도 바라고 있었다. 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증한 일인지를 깨달아 알면 알수록 나는 혐오스럽고 나의 기대나 선한 의도로 여겼던 마음도 구역질이 난다. 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곧 나는 더 이상 도덕적거나 행위로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롬 10:2-4). 한데도 이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보람과 남들에게 보이려는 위선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그리스도는 하늘을 미리 선점하셨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20).” 이는 날 위해 빌고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8:12).” 나의 대언자가 되려 하심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날 위한 중보가 없다면 나는 하등에 쓸모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꼭 내가 그 약속의 기업을 얻게 하시려고 날 위해 기도하신다.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사 38:14).” 가끔은 주체할 수 없는 어떤 서러움, 외로움으로 치를 떨다가도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이의 온전하신 뜻을 기리게 된다. 아무 자격도 어떤 노력도 없던 나에게,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주의 사랑이 이제는 나에게 황송하고 귀한 보화였다. 나의 사사로운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곧 자신이 계신 곳으로 나를 데려가실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나는 주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나의 죄와 마주하게 된다. 나의 어쩔 수 없음 앞에서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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