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11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복음이 나로 안심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한 구절 한 구절의 말씀이 모두 감지덕지, 내게는 분에 넘치는 감사뿐이다. 내 안에는 여전히 불안과 초조가 나를 조종한다. 복음을 알고 이를 믿음으로 더는 끌려 다니지 않고 사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는 자식 눈치를 보고 아내를 살핀다. 요 며칠 그러는 내가 나름은 한다고 하는 것이 서러워서 우울감에 젖어들기도 하였다. 은연중에 내 안에는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는 속성이 있다. 이는 내 의지로 형성된 자아가 아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든 정신적인 어려움 때문이든 어릴 때는 부모로부터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저들의 짐이 된다는 자책이 또한 나를 괴롭히며 궁지로 몰곤 하였다. 나만 없으면 덜 힘들 텐데, 모두가 행복할 텐데, 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도 늘 따라다녔다.
자라면서는 누구를 사귈 때면 늘 그와 같은 회로가 작동을 했다. 저들 속에 섞여 저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는 필요 이상의 긴장과 초조함을 감내했다. 이는 역으로 드러나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위장하였다. 이를 저들이 높이 평가한다는 눈치를 챈 것이다. 모든 학년마다 그래서 나는 기껏 잘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가을이 지나면서는 차라리 새 학기를 기다렸다. 그럼 이번에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영혼은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내 곁의 사람들을 너무 살피고 그 기분을 헤아리느라 소진되었다. 목사가 되었을 때 늘 가까이 하던 선생이 나의 결과를 두고 현실도피로 규정한 것이 어느 부분에서는 맞는 말이다. 나는 현실이 힘에 부치고 늘 이 세상이 고달팠다. 가까이 하는 사람이 더 힘들었고 저들에게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일이 고단한 일이었다. 요즘은 아내와 아들, 딸 가족들에게서 이러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애써도 저들에게 만족함을 줄 수 없다. 만족함은커녕 짐만 되고 부담만 되는 것 같다. 이런 말이나 생각이 자격지심이고 열등감에 의한 것이라는, 심리학적인 이해를 또한 수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의 육신의 구조나 정신의 상태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일은 이중고와 다를 게 없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어디 멀리 도망가 숨어서 살고 싶다. 이러한 우울감이 늘 내 안에 내재되어 있다. 내가 나를 너무 위함인가?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정신으로는 인정하고 의뢰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나의 이런 죄성, 자의식의 어처구니없는 구렁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나의 모양으로 나의 죄로 정하사 율법의 요구가 되게 하셨다. 이를 어느 쪽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육신으로인지 영으로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어 어렵다.
어제는 설교원고 초안으로 본문을 읽고 내용을 살피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도엑’이 곧 나였다. 모든 말씀이 나를 향하는 것이다. ‘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네 혀가 심한 말을 꾀한다.’ ‘간사한 혀는 남을 해친다.’ 도엑은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을 밀고하여 여든 명 넘는 선지생도지망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위인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 일을 서슴지 않았다(삼상 22:6-23).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나를 두고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7-8).” 이는 얼핏 들으면 내가 그 정도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실은 내 안의 열등의식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달아 저울에 넘기는 것이다. 누구를 정죄하고 누구 탓으로 돌려 저들의 죄를 부각시키기 위해 나의 불우함을 이용하는 것이다. 좀 더 살피면 여러 가지 ‘화 있을진저’의 경고가 붙는다.
먼저는 자기 사욕에 따른 끝도 없는 욕심에 대하여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5:8).” 그야말로 오늘 날 우리 현실의 전반적인 행태가 그렇다.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 다음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안위하려 드는 일에 대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술이 한 시름 놓는 위로의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여는 수단이 되었다. 보면 흡연보다 음주가 사회적 문제를 더 크게 유발한다. 다음은 거짓되고 음흉한 꾀가 여러 번 겹쳐서 아예 든든한 동아줄이 되는 꼴에 대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어쩌다 거짓말은 없다. 거짓말이 성공하려면 또 다른 거짓말을 더함으로 정당성을 부여한다. 가짜 뉴스가 판치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극적인 언사의 기반이 거짓과 거짓을 날실과 씨실로 엮어 만드는 양탄자 같다. 그러다 서로를 격려하며 ‘그럴 수 있지!’ 하고 두둔하게 되는 악함에 대하여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는 선보다 악이 선하다. 선은 너무 무력하고 나태하고 태만한 것처럼 여겨진다. 할 수 있다면 더 큰 악으로 얼마든지 선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 그 일이 또 이루어진다. 모두는 결과에 환호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점점 더 자기가 옳고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선호함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다들 그르고 틀렸다. 내가 옳고 나만 억울하다. 이 사연의 놀라운 역설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 할수록 자신은 점점 더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을 무마히시키는 독주에 대하여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이제는 한 잔 술에 시름을 달래는 정도로는 그 한계가 넘어갔다. 자신도 속여야 한다. 남을 감촉같이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언제부터는 어느 게 진짜인지, 거울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주로 빚은 거짓 즐거움과 위로가 진짜 세상이 되었다.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남에 대하여도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0:2).”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으로 약탈한다. 적당히 버무려 포장만 바꾸면 사람들은 속는다. 이처럼 하나님을 적대시함에 대하여,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5).” 결과는 하나님의 분노뿐이다.
이렇듯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나는 요즘 나로 힘들다. 내 곁의 어쩔 수 없는 사람들로 힘들다. 힘들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들이 나로 힘들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는 그들을 의식하는 나는 힘들고 힘들어하는 나를 대해야 하는 저들이 힘들다. 온통 다 힘들다. 누구 이야기를 들어도 저마다 지고 사는 삶이 힘들다. 그 무게가 힘들다. 누가 대신 덜어줄 수 없고 대신 나누려 하면 적대감을 느낄 뿐이다. 아, 그러는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만 같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너무 지나치게 나를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내 곁의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반경이 너무 끼어들어 살려니까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불편함으로 소진되는 것이다. 가족이어서 힘들 때도 있다. 나 자신이어서 어찌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여기에 ‘도엑’과 같은 자신을 보면, 의인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시 52:6).” 먼저는 두려워하고 나중은 비웃는다. 이 사람은 너이면서 동시에 나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7).” 앞서 화 있을 것을 경고하는 사람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나다. 그 모두를 합친 나다.
나는 나의 죄의 뿌리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여겼다. 한데 여전히 길가 밭은 길가이고, 돌밭은 돌부리투성이고, 가시떨기밭은 가시떨기로 가득하였다. 갈아엎고 개간을 이루지 않는 이상 좋은 밭 되기는 묘연하다. 옥토가 저절로 옥토는 아니다. 이를 오늘 로마서의 주옥같은 진술로 정의하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니 어찌 됨인가?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10).” 내 안에 주의 영을 모시고 산다는 일은 날마다 싸움이 끊이지 않고 그 다툼이 여간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럼에도 죽은 나를 살리셨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더는 육신으로 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2-14).”
이를 잘 안다고 알지만 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게 우리의 아집이었고 나를 고착시키고 있는 나의 속성이었다. 굳어진 돌밭 같은 마음이고 엉기성기 가시떨기로 뒤덮인 마음의 밭이었다. 말씀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진리는 싹을 띄워 자라나지를 못한다. 어처구니없이 길가에 떨어진 것은 금세 사탄이 와서 물어간다. 나는 어찌 손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버지를 부를 뿐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말씀 하나하나가 나를 붙들어 앉히신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예수 믿고 사는 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이제는 보이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25).” 그러니 점점 더 나는 할 수 없고, 나로 하게 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참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성령이 날 위해 간구하지 않으시면 나는 이미… 죽어 마땅하였다.
부디 나의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9).” 그리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이와 같은 소망이 내게는 있어야 한다. 구제불능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9-30).” 말씀이 참 깊다. 거두절미하고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이에 말씀으로 마음을 다진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하여,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52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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