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전봉석 2021. 5. 5. 05:52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9:16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3:5

 

 

오늘 로마서의 말씀은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까지 주셨는가를 묵상하게 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주의 뜻과 그의 선하심만을 의지하는 것이 복이다. 믿음이란 신뢰하고 내어맡김이다. 어찌되든 그 모든 사실을 주의 선하심 앞에서 인정한다. 설령 나를 죽이심으로 내게는 희망이 없다 해도 주를 신뢰함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우리는 늘 바라고 구하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진행하실 뿐이다. 그럼에도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오늘 본문 로마서의 말씀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도 위치도 신분도 처지도 안 되는 나에게까지 그 사랑은 충만하여 이른 것이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롬 4:5-6).” 나는 늘 송구하고 몸 둘 바를 알지 못할 사랑이다. 그러므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8).” 그럼에도 여전히 죄성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하여, 은혜를 알면 알수록 내가 원수다. 나의 죄를 알면 알수록 주의 사랑은 풍성하시다. 세상은 그래서 주의 사랑을 싫어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욥 4:18).” 우리의 이성과 나름의 지식이 거치는 돌이 된다. 걸려 넘어지는 죄의 뿌리다. 다들 자신들의 깨달음을 좇는다. 경험치를 따르고 앞서 성공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믿음은 증거도 없고 사실도 증명할 수 없어서 이를 사실로 알고 바라는 것이 곧 주의 능력이다. 보이지 않는 증거요, 바랄 없는 실상이다. 그래서 믿음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비교가 안 된다. 이미 모든 게 다르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하는 영역의 지식이나 설득이 아니다.

 

요즘은 자주 나의 죄성과 나의 믿음을 들여다보며 희한해한다. 가령 이만큼의 믿음이면 이 정도의 죄는 없어야 할 것 같은데, 믿음이 깊고 오묘한 만큼 죄가 짙고 끈덕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저의 인격을 믿는 일이고, 눈에도 안 보이는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믿는 일이다. 곧 인격은 말이고 말은 기억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곧 우리의 인위적인 노력이나 어떤 수고로 인해 얻어내는 성취나 도덕률이 아니다. 가치도 그 기준도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아무리 뭐라 해도 안 되는, 나와 내 곁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내버려둠으로 주께 맡긴다. 이래저래 내가 너무 신경 쓰는 것도 옳지 않다. 나도 나를 주체할 수 없는 게 내 안의 죄성인데 하물며 저들의 것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으며 저들인들 그게 쉬운 일이겠나. 고로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인격은 말이고, 말씀은 깊이 박힌다. 그를 믿는데 그의 말은 못 믿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의 말을 믿는다는 것이 그를 믿는 것이다. 성경밖에는 답이 없다.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은 순종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너무 고단한 게 우리의 문제였다. 사느라 너무들 애쓴다. 애씀으로 너무 수고가 많다. 수고가 많으니 쌓이는 게 많다. 할 말이 많은 것은 들을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 먼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그냥, 누리는 게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이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이다. 바라는 것의 실제란 마치 유가증권이나 부동산권리증서와 같다. 그 땅에 가본 적이 없이도 그 서류, 약속의 증서로 내 것으로 소유한다. 가령 모델하우스를 보고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아파트를 계약하고 시공사를 믿고 이제 공터에 건축도 하지 않은 집인데도 소유하고 누린다.

 

다음은 그런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은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선친들도 그리 하였다. 이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한 게 없다. 아직 낳지도 않았고 생기지도 않은 태중의 아이를 복이 있다 하는 게 믿음이다. 오늘 로마서의 진술은 간단하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롬 9:9).” 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 일이 실제가 될 것을 그때 저들도 알기나 했을까? 웃을 수밖에 없는 약속이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0-13).” 현실도 아닌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다. 살 수도 없는 모델하우스를 보고 믿고 약속을 하고 이를 소유하는 것처럼 때론 우리의 믿음은 무모하고 생경하다. 곧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우리가 주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주만 믿고 주로 즐거워하고 주를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가능할까?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믿을 때 목적이 생긴다. 내 삶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우연한 게 없고 모든 게 의미 있음을 신중하게 대한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주의 선하심을 믿는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모든 사물과 사건과 상황과 여건은 하나하나 의미가 된다. 들의 백합화도, 하늘을 날아가는 참새도, 나에게 두시는 오늘의 이 고약한 현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살핀다. 믿음이란 막연한 기대나 어쩌다 그리 된 수동적인 참여가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다. 신뢰하고 믿는다는 일은 믿지 못할 수만 가지 이유들 사이에서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어려움은 늘 설상가상으로 눈이 내리고 더해서 서리가 내리는 일 같이 겹쳐서 오지만 이를 통하여 오히려 주의 선하심을 붙든다. 주의 선하심을 알면 알수록 나의 죄성은 그 실체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누구는 환경의 문제로, 부모의 교육으로, 그 사람의 성품으로, 삐뚤어진 사회관으로 치부하지만 실은 죄 때문이다. 누구 때문도 무엇 때문도 아닌 죄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그 자체가 힘이 있는 게 아니라 이를 의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권능이 능력이다.

 

그럴 때 나의 무능함으로 주의 권능을 더욱 신뢰한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오늘 우리의 여건은 여정일 뿐이다. 그러할 때 마음에 어디에 둘 것인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이에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신 26:17).” 이는 우리의 의지로 참여할 때 가능하다. 하면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18).”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19).” 이행하신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은 어렵고 몸도 정신도 내가 주체할 수 없을 때 나는 이처럼 말씀으로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주가 아니면 누구에게 아뢸까?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5).” 구하고 믿고 따르는 것은 의지다. 나에게 그리 행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신다. 곧 나의 믿음의 능력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것이다. 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주께서 날 위해 항상 간구하신다. 나는 늘 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죄성을 어쩌지 못하고 흔들리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주는 날 위해 기도하신다. 우리 가는 일은 모두가 처음이라,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4).” 자식으로 살 때나 부모로 살 때나, 어려서 살 때나 나이 들어 살 때나 모든 게 그때마다 처음이라 지나보지 못한 길을 어찌 갈 것인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구하고 의지할 따름이다. 바울은 외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그러므로 다윗이 호소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시 43:1).” 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