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10-11
우리의 권위는 오직 하나, 말씀이다. 말씀으로 주께 아뢰고 말씀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인데,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간구하심이 필요하다. 이때 성령의 간구, 곧 주가 원하시는 것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묵상이 필수다. 묵상은 자신의 신분과 그 처지를 바로 아는 데서 주를 바라는 시간이고 의지적인 행위가 된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주의 말씀이 아니면 오늘에 붙어버린 이 가련한 영혼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8).” 억압된 한 날의 무게로 힘에 겨울 때,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뿐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49).”
이때 성령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함께 말씀으로 임하시는데, 이를 가만히 듣는 일이 묵상이다. 폴 투르니에는 묵상을 ‘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을 이루신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성경을 응하게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 뜻을 바로 아는 데 있어 말씀으로밖에는 소용이 없다는 소리고, 이에 귀를 더듬어 주의 음성을 가만히 듣고자 하는 일이 묵상이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각별하셨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7:12).” 이에 기도는 말씀과 그 약속을 의지하여 주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영으로 한다는 것은 육신으로 사나 그저 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주께 쏟아 붓는 혼신으로 힘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렘 8:9).” 가만 보면 스스로 좀 일구고 안다 여기는 자가 자신의 지식으로 완고해진 것을 본다. 가령 요즘 교회가 세든 공간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아침 일찍 나오는 사장은 종종 들러 이런저런 말을 하다 가곤 한다. 그렇듯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나로 듣는 사람으로 앉히셨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안다. 뭐라 이르기보다 듣는 일은 까다롭다. 왜 저가 저런 말을 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하여는 주께 묻고 아뢴다. 즉 저는 나에게 말하고 나는 주께 묻고 주의 뜻을 헤아리는 일, 이것이 묵상이다. 저를 둘러싼 처가와 친가 쪽에 목회를 하는 목사사 한둘씩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저가 보기엔 한심하여서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교회를 이루어간다는 것을 마뜩찮게 여긴다. 외사촌 중 누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어느 교회 부목으로 전전긍긍하며 ‘쥐꼬리만큼’ 벌어 처자식을 힘들게 하는 것에 대해 한참을 말하였다.
저의 말을 듣는 일은 저의 개인적인 푸념을 들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로 내게는 묵상이 된다. 나도 전에는 그런 나의 부모와 형제를 비난하고 원망하기도 했었다. 나가서 대리운전이라도 할 것이지, 왜 그 능력에 말씀만 운운하며 한두 명 돼도 않는 사람을 놓고, 무책임하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그런 몰이해와 몰상식이 결국은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이치다. 상대적으로 자신은 군고구마 장사에서부터 산전수전 안 해본 일이 없이 오늘까지 이르러 집 몇 칸과 나름 규모 있는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식들에게도 일러 인생은 동그라미 하나를 더 붙이고 덜 붙이는 일에서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가 판명난다고 하였다. 뭐라, 저의 말을 끊고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나는 다만 듣는 사람으로서 저의 말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 그것 또한 묵상이다.
이 아침, 말씀이 나의 어줍은 생각에 명쾌함을 더하신다. 곧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누구에겐 미련하나 누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를 저에게 뭐라 일러준들 들을 귀가 없다. 저는 말하고 싶은 자이지 들으려 하는 자로 내 앞에 온 것이 아니었다. 묵상은 이와 같은 분별을 더하신다. 들어야 할 때와 말해야 할 때를 알게 하시는데, 그 기준은 성령이시다. 어떤 이는 와서 그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떠벌이는 것으로 족하다. 족하다함은 저의 오늘이 비록 어리석은 듯 그릇 판단하고 행동하기에 이르겠지만 그 여정 또한 주께서 다루시는 것을, 듣는다. 듣는 일이 곧 묵상이다. 그리고 이처럼 아침마다 말씀 앞에 앉히시고 듣게 하심으로 듣는다. 이 모두는 의지적인 것으로 그 도, 십자가를 도를 알면 알수록 놓칠 수 없는 가장 귀한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저나 누가 찾아와 차 한 잔을 하며 이런저런 말을 떠벌일 때, 나는 저의 무용담을 듣는 것이 아니라 저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으로 또한 유익한 것은 나는 이를 이처럼 기록한다. 묵상을 글로 기록하는 유익은 누구와 나누는 일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 먼저는 나의 이야기에서 나를 객관화시킨다. 즉 내 말을 하면서도 내 말 안에서 하나님의 말소리를 듣는다. 나의 한 날이 결코 나의 날로 그치지 않게 하는 유익이 있다. 그래서도 이를 글로 쓰고 평소 누구와의 대화나 어떤 책의 문구나 성경구절을 메모하는 습관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귀한 습관인 것 같다.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설교를 들으면서 이를 받아 적게 하였다. 각자가 받아 적은 것을 서로가 모여 나누는 게 성경공부였고, 이를 정리하여 주일학교 교재로 사용하게 한 것도 유익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설교 노트를 적은 것 같은데, 종종 아버지는 아버지의 설교 노트를 깨끗하게 옮겨 적는 일도 시켰다. 그때는 그게 마뜩찮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두고두고 이처럼 유익이 될 줄은 몰랐다.
글을 쓰고 혹은 글쓰기를 가르칠 때 메모의 효과와 일기의 장점을 열변하기도 한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할 때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냥, 쓰는 것이다.’ 아무 거나, 있었던 일이든 느낌이든, 들은 것이든 겪은 일이든… 그 모든 일상의 것에서 주의 음성을 듣게 되는 일이 묵상이다. 어떤 사건사고에서, 또는 사회적 이슈나 어느 인물의 특이한 언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다. 묵상을 정의하라면 모든 일상이 묵상이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으로 귀를 기울이는 직접적인 행위도 꼭 필요하지만 우리의 모든 일상과 그 사물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아내와 자기 모친의 신앙을 자랑하면서도 자신의 거리두기와 이성적인 판단을 옳게 여기는 주인 사장의 이런저런 궤변을 나는 허튼소리로만 듣지 않는다. 나도 그러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영혼으로는 자신의 심각한 죄의 문제를 알 수가 없다.
천하의 다윗이 자신의 업적을 운운하기보다 주께 아뢰기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0-11).” 나름 괜찮다고 여겼던 일에서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그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어찌 막힌 담에 갇혔는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저는 죄를 죄로 알면 알수록 자신의 구제불능인 것을 통회하며 주께 자복하였다. 이를 오늘 고린도교회에 전하고 있는 바울의 설교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어디 감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자신이 훈수를 두고 누구를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겠나? 어느 가까운 훗날 저도 나처럼 부끄러움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나도 한참 때 무기력한 사람들, 교회를 이룬다며 한두 명을 놓고 씨름하며 말씀으로, 말씀으로만 살려하였던 나의 곁의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아,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이제와 누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러했던 때를 돌아보며, 마치 저의 입을 빌어 하나님이 그때의 나를 상기시키시며 꾸짖으시는 소리로 들렸다. 하다못해 붕어빵이라도 팔아서 처자식을 건사하며 열심히 살아야죠?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미뤄두고 고상하게 성경만 보고 누굴 가르치려 드는 것만큼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봅니다! 하는 저의 말이 예전이 나였다. 그러니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5-7).” 묵상은 일상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하여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8).” 오늘도 한 날이 밝아오는 시간에 앞서 주 앞에 앉히시고 내게 들려주시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이처럼 은혜 위에 은혜로 더하심이 귀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0-31).” 이를 감사히 받고 귀히 들을 수 있는 것으로도 이미 은혜 위에 은혜이다. 그러므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이는 주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그것으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나는 세상에서 듣고 주께 아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이 아니면 나름의 수고와 애씀이 헛될 뿐이다. 고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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