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0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말씀의 터 위에 각기 세워져 간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저는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고로 우리는 무엇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 말씀은 묻는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불로 우리를 시험하심은 연단이다. 살며 사랑하며 견디는 시련의 날들이다.
그때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4-15).” 그것이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주를 위해 쌓은 것으로 뿐이다. 곧 말씀 위에 세운 것으로, 반석 위에 지어지는 집과 같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그 안에 주가 거하심으로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어떤 어려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확인한다. 가령 몸이 아프다는 것은, 아픈 것도 일이다. 이에 주를 바라고 주께 더욱 의지하려함이 복이 된다. 우리 믿는 자는 주를 찾고 의뢰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세한탄과 누구 탓으로 원망과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당부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우리는 남을 의식하고 견주어서 자신을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누가 이만큼 했는데 나는 어떤지, 저들은 어떤데 나는 왜 이 모양인지… 그러나 이 일은 헛것인 까닭은, 하다못해 아파보면 안다. 무슨 일이 자꾸 터지고, 어떤 일에 흠씬 두들겨 맞으면 비로소 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7).” 내 안에 주를 모시고 사는 삶이란 악이 같이 할 수 없다는 소리다. 악이란 주를 바라기보다 세상을 바라고 ‘저들처럼’ 추구하는 모든 것이다.
즉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19-20).” 잘들 사는 것 같은 저들의 이상이 모두 허상일 따름이다. 되는 일도 없이 어려움만 거듭되는 것 같은 우리의 고달픔이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정금 같이 나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오늘의 내 신세가 어떠하든지, 또는 현재의 모양이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이미 다 우리 것인 까닭은 우리 안에 주가 거하심이다. 그러니 누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이는 다 나의 것이고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2-23).”
말씀을 따라 그 의미를 되새기다 보면 일련의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상황이 주 안에서 온전하여진다. 요 며칠 교회가 세든 곳의 공사로 인해 은근히 덩달아 신경 쓸 일도 많지만 생각하게 되는 일도 있다. 어제는 문득, 다들 사는 게 참 고역이란 생각을 하였다. 돈을 들여 일을 벌인 주인이나, 이에 동원되어 일을 하는 인부들이나 모두가 고단하고 불안하다. 특히 막노동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환갑을 넘긴 나이들인데 저들 몸에 밴 것은 사는 데 찌든 고단함이다. 뜯어낸 철근과 콘크리트 조각은 연신 수레에 담아 지하로 옮기는 일이 이틀에 걸쳐 거듭되었다. 한쪽 복도에 널브러져 앉아 얼음냉수 한 컵에 잠시 고단함을 달래는 모습이 안됐고 처량하였다. 그러니 돈이 있어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라 마음 편한가? 아침에 건너와 커피 한 잔을 건넸더니, 목사님! 저 새벽 세 시에 나왔다가 두어 시간 앉아 있다 들어갔습니다. 막상 다 뜯어내고 나니 불안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또 자꾸 다른 일이 터지니까요… 하면서 혼잣말처럼 그 속을 털어놓았다. 철거하는 데 몇 천, 다시 꾸미는 데 몇 천, 거기다 생각지도 못한 부대비용으로 드는 비용이 또 얼마… 하면서 저는 마치 보고하듯이 일일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러니 저들 모습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톨스토이의 단편적인 물음에도 스스로들 답을 알고 사는 것인지, 그저 사느라 사는 데 바쁜 것인지.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이방인으로냐 무신론자로냐 하는 데 관심을 갖게 한다. 시편 53편은 시편 14편의 내용과 형식이 흡사 똑같다. 시편 2편에서 41편까지 다윗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지칭하다 42편부터 83편까지는 ‘엘로힘’ 곧 하나님이라 칭하며 부른다. 시편 14편의 5절과 오늘 시편 53편의 5절만 그 내용에서 14편에서는 무신론자를 향해, 53편 5절에서는 이방인을 겨냥하여 진술한다. 나는 무신론자를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언제든 돌이켜 주의 부르심에 합한 자리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로 본다. 반면에 이방인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둘 다 어리석고 둘 다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다고 여긴다.
돈을 들여 사람을 부리는 쪽이나 하루 일당 얼마나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사는 사람이나… 사는 데 따른 수고와 애씀은 다르지 않고 그에 이르는 종착지가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부패하고,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더러는 믿는 자도 그러한 증세를 보이는 것 같은데,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5).” 그것은 자신이 살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본질상 우리 모두는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이를 마치 저는 무신론자니까 또는 이방인이니까 그렇지, 하고 치부할 일이 아니다. 믿는 자로 스스로를 여기면서도 우리 또한 다르지 않은 것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이렇게 성경의 진단은 냉정하다. 의인은 없다. 내가 뭘? 하고 스스로 반항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종종 어떤 어려움의 정도를 두고 서로의 신앙을 평가하거나 저의 삶을 반추하기를 강요하기도 하는데, 이는 스스로 주 앞에 설 일이지 남이 저의 겉모양을 보고 뭐라 할 소리는 아니다. 잠시 휴식 시간에 복도에 널브러져 앉아 얼음냉수 한 잔에 피로를 푸는 이나 저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돈을 지불하는 이보다 못하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슬픔의 정도와 고통의 강도는 각각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이지 누가 나서서 무엇 때문이야! 하고 단정 지을 소리가 아니다. 성경은 엄연히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셨다. 누가 좀 낫고 덜 하고 하는 것으로는 비교나 대조가 안 된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살며 사랑하며 견디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다시 말해 우리의 의는 우리의 것으로가 아니다. 이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믿음이 있다는 것은 순종으로 증거 된다. 의지나 느낌, 마음가짐으로 믿음이 아니다. 순종이라 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데 따른 자신의 거룩을 도모하는 일이다. 주의 전으로서 더는 세상 것을 추구하고 바라지 않으려는, 누구는 큰일을 치르느라 몸이 많이 아프고, 누구는 이 일 저 일이 겹겹이 터져 나오는 현실에서 비명을 지른다. 이러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6-17).” 우리의 행함은 주를 바람이다. 주를 바라는 일은 묵상으로부터다. 묵상은 말씀에서다. 우리 성도의 권위는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오늘을 마주한다. 일상이 갖는 여러 혼잡스러움은 말씀으로 정돈한다. 사람 관계, 복잡한 심경, 사는 데 따른 모든 수고와 애씀 또한 말씀으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이다.
비가 온다더니 어김없이 몸은 또 아우성이다. 어제는 걸어오다 몇 번을 벤치에 앉았다. 허리를 펴고 통증을 달랬다. 하는 것도 없이 덩달아서 피곤한 날들이다. 누구의 아픈 소식과 누구의 연잇는 사고들 앞에서 나는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 가끔 누구와 통화하면서 이를 자꾸 글로 쓰라고 권한다. 묵상은 생각에 머물지 못하고 말씀은 일일이 기억으로 남지 않아서, 나는 종종 아침에 쓴 묵상 글을 열어보고 아무 때나 하루의 어디에서 다시 또 새벽에 함께 하셨던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언어화하여 문자로 글을 적어두는 까닭은 이런 큰 유익이 있다. 자주 자신을 돌아보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를 수시로 되새겨야 한다. 이에 큰 유익이 글이다. 요즘처럼 어디 기록으로 남겨 언제든 보고 또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없었다. 어쨌든 나의 죄, 나의 연약함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믿음의 초석이 된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면 알수록, 나의 약함이 얼마나 주체할 수 없는지 알면 알수록, 도대체 우리는 무엇에 그처럼 정신이 팔려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나로 하여금 주 앞에 서게 한다.
얕잡아 보았던 아이 성에 패하고 저들은 깨달았다.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여…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수 7:5-9).” 이와 같이 우리는 주 앞에 엎드릴 따름이다. 사는 게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게 없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선 길에서는 반드시 이전표를 보고 가야 한다. 이 나이쯤 살았으면 알 것도 같은데, 실은 이 나이도 처음 살아보는 것이라! 만만하게 여겼다가는 아이 성에 호되게 당하는 꼴이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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