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 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7:17
때론 속상하고 때론 감사하면서 누구 일로 주의 이름을 더하는 것이 나의 날이 되었다. 누구의 사연이 마음에 남고 누구로 인해 어떠한 상황이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 또는 함께 기뻐하며 주의 이름을 더하기도 하면서. 이것이 결국은 성령으로의 인도하심인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가끔은 두 마음이 서로 싸운다. 싫은데 걸리고 걸린 마음은 저로 인해서도 주를 바라게 한다. 내 안에 착한 일, 이를 시작하신 이, 예수의 날까지 이루심… 이를 되뇌며 여러 생각이 동시에 오간다. 이게 좋은 일로인가, 나쁜 일로인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변방의 한 늙은이의 말에 대한 사연 같이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 기르던 말이 오랑캐의 땅으로 도망쳤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위로 하자 변방의 늙은이는 괘념치 않고. 얼마 뒤 오랑캐의 땅으로 달아났던 말이 다른 말 한 마리와 같이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복이 들어왔다며 떠벌이는데, 이것이 좋은 일로인가, 나쁜 일로인가. 인생사 새옹지마란 알 수 없음이 그 의미에 담긴 것이겠다. 하면 우리로서는 주의 백성으로 산다는 일,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신 줄을 안다는 것. 나를 지으셨고 나는 그의 것이며 그의 백성이고 그가 기르신다는 것에 대하여 안도한다. 오늘의 이런저런 일이 어떠하든, 주는 나의 주님이시다.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다. 두통과 어지럼을 견디지 못하고, 저의 초기 진단은 저압성 두통이었다. 어제의 검사로는 척추 어딘가에서 뇌척수액이 유출, 어딘지 우선 찾아야 하는데 이를 찾기 위해 조형제를 놓어야 하는데 우선은 이에 따른 부작용이 아이 특이체질에 있다 하고… 아내는 조카아이 소식에 마음을 졸이지만 이 일이 좋은 일로인지, 나쁜 일로인지.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저를 위해 기도하였다. 한동안 일부러 찾아와 성경공부도 하고 주일에 예배도 오고하더니, 언제부턴가 시들하여졌다. 평소 생각이 많고 진중하여 이런저런 말을 많이 나눈 사이이나 뭐라 일러야 할지. 다만 주의 이끄심을 느낀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뭐라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 아이에게나 아내에게는 입을 다물었지만, 주가 이끌어 돌이키게 하려 하심을 안다.
우리 속에 주의 영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모를 때가 많다. 아니 이를 부인하거나 간소화하여 가벼이 치부하기 일쑤다. 그러니 곁에서 뭐라 한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싫어서 그러는 것일 텐데.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에 대하여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어쩌겠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하나님도 방기하고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그러실 수 없는 주의 백성이요, 권속인 것을. 그러함에도 주를 모시기 싫어하는 마음에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나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싫다고 주를 멀리하고 살 동안 내 안에는 저것들로 가득하였었다.
흔히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을 무슨 대단한 칭찬처럼 사용하곤 하는데 결국은 무법천지란 뜻이다. 그만큼 선하다한들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수군거림과 비방과 배약과 우매가 우리를 주관하지 않던가? 나는 그랬다! 내가 옳고 나는 내 맘대로 굴고 싶었다. 어제는 아내와 잠깐 무슨 말 끝에 아들녀석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내가 전에 아버지에게 보였을 태도에 대하여 실제 어떤 기억 한 토막이 가슴을 찔렀다. 늘 교회 일로 어려움에 처하면서도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이 뭐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에 대리운전이라도 하시라. 엄마에겐 식당에서 주방일이라도 하시라. 그때 그렇게 씨불였을 때 저들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나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교만과 자만과 능욕하는 말로 상대를 공격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오늘에 이르러 모든 게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어서, 아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다가도 내가 투정이 많다싶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사람이 존귀하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하긴 그래서들 이를 알고 언제부턴가 사람보다 개를 끼고 사는 세상이 되었는지. 산책을 하다보면 개를 무슨 아기 돌보듯 어르고 달래 품에 안거나 함께 걸으며 애정을 다하는데, 하긴 사람을 대하는 일보다 개를 대하는 게 속이 편한 세상이 되긴 하였다. 요즘은 자주 걷고 산보를 하다 길거리에 오래 앉아 있곤 한다. 아이의 일은 새로운 변수다. 직접적으로는 그 부모나 직계 가족의 일이겠으나 한 다리 건너 나에게 특히 저 아이는 특이하였다. 남다른 애정이랄까, 어떤 기대가 있기도 하였다. 전에 언제는 나도 뜬금없기는 대놓고 아이에게 신학을 하라고 권했었다. 철학을 했으니 성경이 남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데서, 아이의 이런저런 상처를 두고서도 나는 그렇게 말해놓고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좋은 일로일지, 나쁜 일로일지. 오늘에 닥친 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어떠하든지 선하시다. 나는 요즘 안정제를 두 알씩 여섯 번을 먹는다. 어떤 날은 아침에만 네 번을 몰아서 먹는다. 용량이 그리 크지 않다 해도 빈도가 너무 잦다. 스스로도 아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다. ‘미장원집 아이’가 느닷없이 그러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저 아이의 억눌림이 무엇일까?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나의 억눌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약물을 통해 이를 억제하며 눌러주는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지만 그럴 때마다 더해지는 유익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나의 간절함은 나의 절박함과 비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조카아이에게도 카톡으로나마 기도하고 있음을 알린 것은 저 아이를 믿는 게 아니라,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두시는 난감함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신다.
그러할 때 잠언은 누누이 그 마음을 다스릴 것을 권하였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게 본의에 따른 행실로 나타나겠나? 사람은 보면 내남없이 주를 싫어한다. 죄가 더 익숙하고 편하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돈 버는 일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자기 만족감에 모두는 한눈을 판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 마음을 달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23:26).” 이 일이 고약하게 여겨지기도 할 테지. 그러나 무엇보다 지켜야 할 것이 마음인 것을.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최소한 나는 나의 지난날을 들추어 몇 개만 떠올려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악하고 추한 게 나의 마음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를 눙치고 시치미 떼고 산다고 살지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아니면 나는 구제불능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실은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감사한다. 지팡이를 짚고 걷다 채 20분도 못 걷고 어디 앉을 자리가 없나 하고 찾고, 특히 오전에는 왜 그렇게 더욱 답답하여 숨을 쉴 수 없는지. ‘무엇 때문일까?’ 하고 더는 원인을 찾지 않는다. 다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주의 능력으로면 충분하다. 필요하면 안정제도 먹고 어디 앉아 산보보다 사색이 더 길어지기도 하면서,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14).” 나는 누구의 안 좋은 소식에 마음을 둔다. 이는 유익이 있다.
우울하게 왜 그런 걸 들어? 그런 걸 봐? 그런 얘길 왜 해? 하고 아내는 종종 핀잔을 주지만, 일부러는 아닌데 나는 마다하지 않고 ‘슬픈 이야기’에 시선을 두곤 한다.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유익한 까닭은 잔칫집에서보다 초상집에서 배울 게 더 많은 것과 같다. 슬픔이 기쁨보다 나은 것은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간절하게 바라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일로, 친구의 안 좋은 소식으로, 심지어는 어느 영화의 팍팍한 삶에서도 가령, <미안해요, 리키>라는 영화를 보고 택하는 이들의 노고를 알게 됐고, 고맙고 미안해한다. 우리네 사는 일이란 주의 은혜 아니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에 대하여는, 필리핀 동생의 전화에서 저의 처남네가 모조리 코로나에 걸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식에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특히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저의 처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동생은, 그런데도 도로 살만해지니까 맨 먼저 하는 게 주식타령이야!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 아닐까?
그래서 주님은 미연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 십자가를 지우신 것이다. 이게 복이라. 곧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하는 신앙고백의 바탕을 이루는 거였다. 그러므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 얼마나 귀하고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 7:12).”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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