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전봉석 2021. 6. 4. 06:00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 7:1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72:18-19

 

 

만사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다는 착각. 하는 일이 나름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착시. 마치 진정제를 먹고 조금 살만한 것 같다는 거짓 안정이 우리로 하여금 주를 온전히 두려워할 줄 모르게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사회복음’을 내세우며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위해 복음의 참 뜻을 왜곡한다. 사교와 경쟁하듯 사람들의 기호를 맞춰가며 심리학과 견주어 서로의 평안을 우선하면서 사회봉사와 지역사회의 헌신으로 복음의 역할을 퇴색시킨다.

 

이와 같은 내용을 설교원고 짬짬이 읽으며 메모하며 공감했다. -마틴 로이드존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복 있는 사람). 요즘은 새로 책을 사는 것보다 읽었던 것을 다시 읽는다.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께는 우산을 들고 산보를 했다. 낙숫물로 인해 어느 처마 밑의 돌이 아이의 새끼손가락 마디만큼 패였다. 얼마쯤의 시간이 더해지고 물방울이 가해져야 저만치 움푹 들어가 흔적을 남길까? 어릴 때 마룻바닥 모서리가 맨들맨들 매끄러워서 한참씩 손바닥을 쓸어보곤 했던 기억도 있다. 우산을 받쳐 쓰고 조용히 내리는 빗길을 걷다보니 새삼스러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데 있다. 오늘 말씀에서 새삼 어제 생각하였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경외함의 기본 감정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에서다. 이는 이어져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하는 시편의 말씀을 마주한다. 곧 참으로 두려워할 줄 알 때 감사도 나온다.

 

가령 요즘 아내는 무릎 수술 뒤에 비로소 조심하며 소중한 것을 안다. 아직 힘을 다 주지 못해 평소 습관처럼 서둘다 휘청, 삐끗하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하는데 그런 모습에서 진리를 생각한다. 곧 우리의 감사는 좋을 때 호들갑을 떠는 즐거움이 아니다. 어찌 저런 환경에서 저런 고백이 나올까 싶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하는 말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친구 아히도벨에게 배신당하고서 나온 것이다. 이 또한 같잖은 시므이의 조롱을 받으며 황급히 궁을 빠져나와 도망할 때에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내리는 빗길을 낮 동안 정리하던 설교원고를 떠올리며,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자라간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디가 늘 아프다. 무슨 일로 매사 예민하다. 그런 나를 두고 아내는 가끔 고개를 흔든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데 어찌 안 그렇겠나? 나 또한 가끔씩 그러는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면서, 그러는 나조차 나는 이제 주께 떠맡겨버리려는 것에 희미하지만 안도감도 든다. 그러니까 아들에 대한 걱정이나 어떤 일에 대한 염려나 무엇에 대한 조바심 등을 자꾸 덜어내듯 주께 아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그것으로 설교원고를 접근하고 말씀을 붙든다. 할 때, 오늘 말씀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렇듯 가령 아들이 공부를 하면서 점점 말 수가 줄고 성격이 까칠해져 그 앞에서 숨 쉬기조차 어려운 것을 느낄 때, 어찌 이런저런 불편함이나 근심과 걱정이 앞서지 않겠나? 한데 이를 자꾸 주 앞에 떠넘기고 내려놓을 때의 근심은 그러한 감정으로 주를 더욱 생각하게 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모습을 보며, 아니 그런 나의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한다.

 

내가 주를 업신여기듯 함부로 굴며 살던 때를 생각한다. 예배를 우습게 여기고 절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때를 떠올리면서 그때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떠하셨을까? 오늘의 나와 같은 심정은 아니셨을까? 안쓰러우면서 고약하고, 괘씸한데 마음이 쓰여 행여 내가 신경 쓰는 것조차 불편하게 할까 하여 조심스러워하면서… 어제는 가정예배가 끝나고 괜히 심통난 사람처럼 아내에게 투덜거리며, 어디 공부만 끝나 봐! 하고 괜한 어깃장을 놓기도 하였다. 마치 그런 식이다. 전날에 친구와 모처럼 통화하면서 예전에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낄낄거리며 놀던 때를 떠올렸다. 이제는 누구보다 대화가 어렵고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한참씩 미루다 안부를 묻곤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마저도 통화가 내내 나는 저가 여전히 거기 그대로 머물며 하나님 없이 사는 것에 마음이 쓰여, 이리 말을 걸었다가 저리 말을 걸었다가 통화가 끝나고 난 뒤에야 주를 더욱 알리고 말해줄 걸, 하는 후회가 또 슬픔처럼 오래 남는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오늘 말씀으로 비춰보면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하는 대목에서 벌써, 그러니까 말이다. 그저 낄낄거릴 수 없는 전에 같으면 공통의 화제가 이제는 관심이 없다. 누구의 문제로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되새기고 또한 주를 더욱 바라게 되는지를. 그러면서 내 안에 두시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과 상대적으로 더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게 하는 마음이 서로 얼마나 치열하게 다투는가를.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내가 주를 두려워할 줄 알면서 아들이나 딸에 대한 염려가 그저 앞으로 사는 일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 아니어서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말의 정도가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가를 아는 데는 몇 마디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앱 4:17).” 그게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 여겨지는 어떤,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게 확연히 다른 것을 느낀다. 그리고 참이 서로 다른 것을,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즉 서로가 바라는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친구의 말에 나는 신중할 수 없고 나의 말에 친구는 시큰둥한 것은, 마치 어둠과 빛의 차이 같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전에 추구하던 것들로부터 놓여난 것을 느꼈다. 한참씩 나는 혼자 어딜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것도 늘 사찰이나 어느 고즈넉한 곳이어서 은은하게 퍼지는 풍경소리며 서걱서걱 부는 바람으로 들려오는 염불 외는 소리나 향내를 좋아했고, 가만히 그렇게 또 오래도록 시선을 두고 앉거나 걷거나 할 수 있는 혼자 내버려두는 시간을 사랑했었다. 언제 혼자 동해 어디 해변에 앉아 몇 시간이고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기억도 났다. 밤새 그랬는지, 아침에 근처 해변을 거닐던 노인이 다가와 밥은 먹었는가 묻고 제 집에 데려가 라면을 끓여주고 한숨 재워주기도 했던 기억도 난다. 고물을 주워 모은 듯 방안 가득 잡동사니가 쌓였고, 오전에 설핀 곤한 잠에 빠졌다 일어났을 땐 노인은 없고 빈방에 덩그러니 앉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던, 그때의 기억은 온통 고요다. 세상이 다 적막하여 귀가 이상한가? 할 정도로 조용하였던 한낮의 햇살이 쌓아둔 신문더미와 여러 개의 가방이며 옷가지들 사이로 비추고 있던 기억. 그런데 밖에서는 가만히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던. 종종 그와 같은 기억은 낭만처럼 느껴지다 그때는 무엇을 찾아 헤맨 것인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와의 대화 또는 어떤 일을 두고 내심 주를 바라며 주께 아뢰는 것이었으니. 오늘 말씀은 나에게 일러,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고후 7:12).” 곧 이제는 나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의 것으로 소용되기를. 그 모든 추구와 가치가 부질없었음을. 나의 소양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천천히 우산을 받치고 걷다 너무 조용히 사르륵사르륵 내리는 빗물에 다 지나간 시절이 새삼 그리운 것도 같았다. 언제 여름 소양댐에서부터 얼추 다섯 시간이나 걸려 춘천역까지 걸어올 때, 소낙비가 그처럼 반듯하게 내렸었던 기억도 났다. 저만치에서는 밝고 뜨거운 여름 햇살이 강렬한데 거짓말처럼 이쪽으로만 사르륵사르륵 한 줄기 쏟아 붓고 사그라지곤 하였던….

 

그런 나의 날들 동안에도 하나님은 나를 가만히 지켜보시며 곁에 같이 계셨던 것을 어째서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와 같은 나의 다른 면과 또 함부로 굴며 괴팍하고 고약하게 굴었던 날들에도 무심히 나를 믿고 기다려주셨던. 그러니 요즘은 나의 믿음이란 게 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 강한 신뢰가 간다. 곧 오늘 내 안에 어떤 근심은 회개로, 감사로 나아가는 외길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9).”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나?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16).” 이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 알수록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고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