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전봉석 2021. 6. 5. 05:36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 8:12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공사가 막바지에 치달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형태의 구조나 모양이 나오는 데 놀란다. 그것과 맞물려 버려지는 것들이 느는데 어떤 건 그대로 멀쩡한 것을 뜯어내어 폐기물더미와 같이 복도에 쌓았다. 그때 주인이 곁에 있어 이것도 버리나, 아깝다 하고 운을 떼자 저의 말은 단호하였다. 아무리 아까워도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입니다. 나는 그래도 아까워서 멀쩡한 합판 두 장과 조각을 낸 판막음 조각 서너 개를 들여갔다. 버려져 밟힌 자국을 닦고 화분 받침으로 쓰거나 창고 안쪽에 햇볕을 가리는 가름막으로 세웠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 13:8-9).”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이틀이 멀다 하고 누가 나가고 누가 새로 들어오는 가게마다 공사 중인데, 멀쩡한 것이 뜯겨나가고 새로 인테리어 되는 과정을 보다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버려진 것에는 흠이 있었다. 물수건으로 닦다보니 톱날을 잘못 받아 생채기가 있거나 모양이 약간 비틀어진 것이었다. ‘주인이여 그대로 두소서.’ 하고 쓸모없는 것을 가져다 바로 세우시는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그러하지 않던가?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쓸모없는 것을 들어 쓸모 있는 것으로 귀히 다루어 사용하시니 그 은혜가 크다. 우리로 이를 기쁨으로 여겨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주를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였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나는 버려지는 폐기물을 보며, 그와 같은 주인의 말에서, 왜 주께서 우리에게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라 하시는지를 짐작하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모든 게 너무 풍성한 세월이다. 다음 날 새벽이면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고 이를 하나 소유하는 데 허비되는 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간다. 쓰레기가 늘고 사람의 노동력이 혹사된다. 있는 자는 더 많이 가지고 없는 자는 있는 자처럼 행사한다. 이솝우화에 <황소와 개구리>가 생각난다. 개구리는 늘 자신보다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황소를 부러워했다. 그의 곁에서 그와 같이 커지고 싶은 욕심에 바람을 배에 채우다 배가 터져버렸다. ‘아무리 멀쩡해도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다.’ 예수의 말씀을 많은 사람이 즐겁게 들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막 12:37).” 저들은 다 어찌 되었나? 많은 사람이 따라 애굽에서 나왔다.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출 12:51).” 그 많던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니 참…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나는 화장실을 오갈 때마다 복도에 내어놓은 폐기물더미를 보며 생각이 많았다. 아직 멀쩡한 나무 막대 긴 것을 두 개 가져다 창고에 세워두었다. 그냥 그렇게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서 말이다. 세월은 흘러 어느새 중년의 나이로 살다보니 삼삼오오 모여 시시덕거리며 담배를 물고 섰던 아이들을 보면 같은 마음이다. 그럴 때면 성경은 큰 소리로 부르시는 것 같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이를 아까워서 어찌할까? 하는 나의 마음으로 알게 하신다. 저것들 잘 가져다 멀쩡한 것은 누가 쓰겠지… 하고 생각하였는데, 폐기물처리업체는 가혹하였다. 멀쩡한 것도 뚝뚝 분질러서 자루에 담아 버려지는 쓸모없는 것들과 한데 묶어버렸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나이가 들면서 버려진 시간을 돌아보며 아쉬워하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오늘 말씀이 그러한 심정으로 다가왔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이 아니면 하등에 쓸모없는 것을… 그러므로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나도 시편의 화자처럼 저들을 부러워했다. 시기하고 질투하다 미끄러지기도 하였다. 저들은 뭘 해도 잘되는 것 같다. 괜히 나만 억울한 심정도 든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2, 13).” 저들과 견주면 오늘의 나의 모습은 헛돼 보인다. 그럼에도 주님은 협착하고 좁은 길로 가라 하시는 것이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참으로 지루한 싸움이기도 하다. 믿음으로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과정이다.

 

그때그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도 있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멀쩡하게 당하는 수모처럼 버려진 듯 외면되어 주가 나에게서 숨으셨는가,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덩그러니 남은 것은 말씀뿐이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8).” 그러니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이런들 나아지기는 한 걸까? 혹시 내 안에 안주하려는 합리화는 아닐까? 싶은 회의와 갈등으로 나를 휘저어대는 나 자신을 향해서도 항변할 수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꾸미고 덧대어 구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상황과 환경이 결코 우리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우리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른 것도 아니다. 무던히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까지’ 말씀으로만.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8).” 오늘 이와 같은 어떤 답답함의 근간은 누구나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모난 마음으로다. 욱, 하고 치밀어 올라오는 화가 있다. 훅, 하고 못 견딜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이 늘 엄습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또 결심해도 소용이 없다. 소용이 없는 나의 그 무력감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도우심과 자비가 아니면 그야말로 버려져서 여러 다른 산업폐기물과 같이 처리돼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 나에게 말씀으로라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내가 이루어 갈 수 있는 말씀일까? 어떤, 말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주께 선다. 그럴 때면 성경은 내 손에 지팡이를 하나 들려주시는데,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하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그렇지. 여기가 아니다. 이것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가령 누구에 대해 기도하며 바랐더니 주께서 좋은 결과로 인도하시는가, 상태가 호전되고 곧 예배에 나오게 될 줄 알았다. 한데 패혈증으로 인한 혼수상태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 갔고 현재는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덤덤하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리지만 저의 속은 어떨까만. 같이 기도하며 희망을 가졌던 게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나 또한 마음이 시무룩하였다. 그러게 그때 기력이 어지간하고 정신도 돌아와 난 어느 교회로 갈까? 하고 물을 때 모시고 오지… 하는 아쉬움도 뒷덜미를 잡게 했다. 내 의지나 내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일의 경과를 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에 기대를 잃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면 또 성경은 이르시기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아, 믿음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나는 나의 행실이나 됨됨이를 돌아보며 믿음을 의심하곤 한다.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이 의심이 많고 흔들리기 잘하는 나로서는 하물며 나 같이 쓸모없는 것을 어쩌자고 버려두지 않으신 것일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이에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 오늘 말씀이 나를 불러 세우신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7).” 이처럼 말씀 앞에 세우시는,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비록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그런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1, 22-23).” 하등에 쓸모없는 것을 주의 곁에 두심으로 무엇에 쓰시려는가, 나는 주의 말씀만 뒤적거린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