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전봉석 2021. 6. 7. 05:57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2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6-7

 

 

자기가 자기를 헤아린다는 말, ‘이만 하면 됐지 뭐!’ 하는 자기만족으로 자기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 ‘그래도 내가 저보다 나아!’ 하는 판단. 이를 가리켜 오늘 본문은 지혜가 없다고 한다. 이어서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하고 엄연히 선을 긋는 듯한 이유는 분명하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곧 나를 나로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므로 나도 나를 두둔을 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것, 하물며 누구의 판단으로이겠나?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오직 주만 바라고 산다는 것은 ‘낀 시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어제는 그런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우리가 사는 이 인생을 여기서 저기 사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시간까지로 그 사이에 낀 시간이란 것이다. 이 표현은 폴 투르니에의 것으로 <인간 장소의 심리학>에서 ‘집을 떠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도달하는 동안의 시간은 마치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의 손이 이쪽 그네를 놓고 저쪽 그네로 옮겨 잡기까지 허공에 떠 있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육신의 고단함과 정신의 나약함과 마음의 들썽거림으로 어쩔 땐 애매모호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럴 때 그러는 자신을 스스로 헤아리려고 하거나 자신을 비교하여 스스로 얻으려는 위안을 모두 어리석은 것이라 단정한다.

 

우리는 다만 그가 그의 길을 가르치실 것임을 붙든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특히 힘들 때, 주 앞에 나올 기회다. 고난은 우리로 느슨해지는 마음을 바로잡게 한다.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 한다. 그렇게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30:29).” 하시는 데도 나는 종종 ‘풀 죽은 기도’로 마음을 달랜다.

 

어제도 예배 잘 드리고 아내와 둘이 산책을 하고 돌아왔는데 허리가 찌릿 하는가 싶더니 오후가 되면서는 어깨며 옆구리며 안 아픈 데가 없이 아팠다. 짜서 바르는 파스를 문지르고, 허리를 지지며 누웠는데도 어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오면서 세제 두 통을 사서 가방에 넣고 어깨에 메고 온 것 때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허술한 몸이고 아니면 달리 아플 이유가 없는데… 싶어 서러워지는, 나는 그렇게 ‘풀 죽은 기도’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의 그 ‘낀 시간’을 나는 당황하기도 한다. 통틀어 인생이 그렇고 그때그때 세세한 것들 사이와 사이에 낀 시간을 황당해 하다 보면 ‘나를 어쩌면 좋을까?’ 싶은 어처구니없는 마음으로 풀이 죽곤 한다. 그럴 때 주님은 자신이 가시는 길을 분명히 하셨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이를 다 알고 계셨던 것.

 

문득 옴짝달싹 못할 ‘낀 시간’에서 주를 바라는 마음이 나의 날을 돌아보게 한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확인하게도 한다. 애매하게 뒤섞인 것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다. 고통이 좋다는 소리로 들릴까봐 조심스러운데, 내가 무슨 엄청난 득도를 한 사람도 아니고! 나야말로 아픈 게 싫고 고통스러운 게 짜증스럽기만 한 한심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것으로 주를 바랄 때 달려갈 곳을 다시금 분명히 하게 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그렇게 믿음의 사람들은 성전을 향해 올라갔고 죽음과 부활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살았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러니까 아주 가끔 또는 종종 나는 나의 부실한 육신이 그 어떤 교훈보다 단호하고 엄연한 가르침이 되곤 한다. 끙끙 앓는 소릴 내며 잠들었는데, 그런대로 이처럼 일어나 앉아 다시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기력과 회복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더욱 귀한 은총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것도 남다른 고통으로였다. 어쩌면 오늘을 살면서 가장 큰 오해가 일회적이고 즉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에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기도는 자판기 버튼을 누르듯 하고, 예배는 여가시간을 선용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전부고, 스스로를 적당하게 여기려는 ‘자기 헤아림에 중독된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것은 아닐까? 끝도 없고 막연하여서 이 길이 맞나? 싶은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보다 빠르고 순간적인 반응을 응답으로 삼으며 주를 바라는 것을 마치 비싼 요금제를 쓰는 빠른 데이터 속도 정도로 마주하곤 하는, 그래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이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다 저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면서 우왕좌왕 하는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나는 가끔 나의 육신의 약함에서 나의 마음은 선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구슬프지, 서럽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 말한들! 아무도 알아줄 수 없는 것으로 풀이 죽어 ‘풀 죽은 기도’로 주님, 하고 부를 뿐이지만 그것으로 이처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나는 나의 분수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고 자랑하지 않게 된다. 곧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누가 뭐라든지, 내 자신도 나를 놓고 한심하게 여긴다 해도 ‘마땅히 생각할’ 생각으로 족한 것이다.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때 나의 천국은 뚜렷해진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소리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직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3-6).” 하나님의 능력으로밖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사실 앞에 속수무책인 나로 안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고약하기 짝이 없는 나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의 복종을 온전하게 하시는 일도 주가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12).”

 

스스로 옳다, 괜찮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자들에게는 어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이겠으니,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12).” 그래서 나는 되레 나의 난감함을 사랑한다. 특히 육신의 고통으로서는 군더더기기 없다. 아픈 건 아픈 거지, 고상을 떨고 위선을 삼을 여유가 없다. 오직 분수 이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게 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게 한다. 남들은 어떠니, 누군 어떤데… 하는 열등감이나 자격지심도 사치가 된다. 그냥, 아픈 건 아픈 것이다. 아프니까 주님, 하는 소리밖에는 달리 부를 게 없다. 설마 무거운 걸 가방에 메고 왔다고 해서 허리가 삐끗, 아픈 것일까? 아내는 나의 저질 체력 앞에 혀를 끌끌 차고 오후께 교회에서 돌아온 딸애는 또 아파? 하는 식으로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들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이것이 ‘낀 시간’을 감당하는 것이었다(13).

 

어쩌겠나? 지금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여기서 저기로, 그 사이에 허공을 떠 있는 공중곡예사의 손에 잡은 것 없이 ‘떠 있는 시간’이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까지의 시간, 죄 된 나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낀 시간’ 동안의 나로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17).” 나는 오늘 말씀을 그럴게 실감하고 있다. 이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8).” 그러니 내가 칭찬을 받을는지 꾸지람을 받을는지,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소리를 들을는지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는 말씀으로 호되게 야단을 치실는지, 이렇게 ‘여기서 저기까지’ 손에 잡은 것 없이 허공에 떠서 저쪽 그네에 손을 뻗고 기다리는 시간은 오직 시선을 둘 곳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시 75:1).” 아직은 아닌데 싶은 가운데도 저만치서 정확히 날아오는 그네로 손을 뻗고 사력을 다해 기다리는 것이 신앙이었다. 때론 마뜩찮고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 같아도.

 

오직 주만 바란다는 것은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6-7).” 주가 행하실 것을 확신할 따름이다. 그러는 동안 주께서 행하신다.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8).” 할 때,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