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전봉석 2021. 6. 19. 05:41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7-19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

시편 87:3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 이야기를 가진다. 누구라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이야기를 말 할 때, 실은 이를 다 아는 사람은 없다. 마치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우리의 기억은 어느 특정한 사건 사고 외에는 모두 지워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망각의 은혜가 있어서 살 수 있다. 죄다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제 하루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이다. 다소 억눌렸거나 횡재했거나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만 그것도 어느 특정한 형식 없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가령 요 며칠 나는 아이들이 공부가 끝나가 돌아갈 시간에 맞추어 아파트 밑을 서성거렸다. 며칠 전에 있었던 짓궂은 아이들의 못된 짓으로 혹시나 하는 염려 때문이다. 아이들 가운데는 초등학교 4, 5학년 때 글방으로 오던 아이들도 있다. 어느새 중2, 중3이 되었다. 아내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아이들에게 호루라기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이 남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 안다. 결코 전부는 아니다. 누구도 자기 이야기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좀 안다고 여기는 정도로 전부를 아는 체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이함을 다루실 때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신다. 돌아가거나 도저히 돌아갈 수 없게 막아버리신다. 그렇게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종종 노인들 사이에 앉아 해바라기를 한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는데도 노인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구구절절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며 겪었던 이야기가 서로 오간다. 개중에 사할린에서 오셨는가, 옛 소련 러시아 연방 동쪽의 말소리도 들린다. 나는 가만히 음악을 줄이고 저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움이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의 위기는 집중호우 같다. 질척거리면서도 갈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신 인생을 살면서도 다 알지 못한다. 어찌 전개될지 알지 못하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과 같다. 그런 가운데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겪을 때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안다. 오늘 시편을 읽으며,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시 87:1-2).” 고라의 자손이 쓴 시이다. 고라는 일찍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하던 인물로 땅이 갈라져 저들을 삼켰다. 이를 목격한 뒤 고라의 자손들은 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어, 성전에서 찬양을 전담하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저들은 안다. 이에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셀라)(3).”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의 성이면서 주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24:7).”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들락날락하신다. 우리 이야기는 단지 나, 개인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서로가 이혼을 했는지, 전에 같이 생활하던 사람과는 어떠했는지, 그 사이에서 난 아이들을 데리고 두 사람이 어쩌다 만나 사랑을 했는지, 그 둘 사이에서 아이가 낳는데 각각의 형제들과는 스무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있다. 아이가 공부방에 오면서 저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들려졌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는 칠순이 된다. 처음엔 지능에 문제가 있고, 언어와 행동에 강박적인 요소가 있어 이런저런 사고도 있었지만 아이는 이제 미주알고주알 자기 집 이야기를 들려줄 줄 아는 언어와 인지를 가졌다. 한 아이의 인생 이야기에도 몇 사람의 구구한 이야기와 이야기가 얽혔는지 모른다.

 

작가는 복선을 두고 여러 겹의 우연과 우연을 포개어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목적이 있다. 각자의 인생 이야기에 담겨 있는 주제가 각각 다 다른 것 같으나 하나다. 이를 오늘 바울은 아름다운 진술로 전개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우리는 결코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알 수 없다.

 

이를 알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뿐이다. 그러할 때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저가 내 안에 들어오신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알 게 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이어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오늘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도 충만하게 하시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안다. 곧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는 사도의 기도는 엄연한 것이다. 곧 우리가 아무리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능가하지 못하실 게 없다(엡 3:17-19). 죄와 허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렇게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곧 이 때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있는 그대로, 그래서 주저하면서도 나는 주가 이루시는 일에 주목한다. 어찌 다르실지 또는 어떻게 전개하실지 때론 알지 못해 두렵고 망설여지기도 한다. 가령 누구를 상담하고 어떤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할 때 나의 예민함은 앞서 가슴이 뛰고 감정이입이 따른다. 누구의 사연을 듣다보면 내가 먼저 쿵쿵, 울려대는 심장소리에 귀가 멀 정도이다. 그런 나의 연약함을 주가 더 잘 아신다. 어제도 실은 ‘아픈 아이’와 이런저런 말로 말이 좀 길어졌다. 솔직히 어떤 내용이 제대로 서로 전달되는 일은 어렵다. 요지는 오후에도 직장에 더 남아 일을 하게 해달라고 회사에 자꾸 건의를 하는 모양이다. 그건 네가 요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고 몇 번 설명을 했는데도 소용이 없다. 어제도 회식 자리에서 또 그 말을 꺼낸 모양이다.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없을 때, 나는 주를 바라본다. 주가 전개하실 이야기를 나는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란 주께 돌아본다. 아뢰고 고하며 그와 같은 사연을 기도하다보면 내 인생 이야기에 왜 저의 이야기가 중첩되었고, 우리 사이에 깔린 작가의 의도적인 복선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된다. 바울은 그렇게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록하고 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엡 3:1-2).” 저가 갇힌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저들에게 전하고자 함이고 저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아뢰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나의 생각은 저가 좀 더 자유롭게 또는 어느 정도 권력을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더 많은 사실을,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단편적인 이해 수준이다. 그런데 성경은 일러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다. 내가 저 아이를 고칠 수도 없지만 바꿀 수도 없다. 들어주고 응원하고 나무라고 충고하고, 그럴 때 저의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나는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 어떻게 이 일이 전개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싸움은 ‘하나마나 한 소리’ 같은 말을 그래도 하는 일이다.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하는 회의를 누르고 참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아이를 무시하지 않고 괜한 말로 아이를 핀잔하지 않으면서,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8).” 그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를 신뢰하는 것뿐이다. 이야기 전개가 때론 꼬이는 것 같고 위기와 절정을 오가며 집중호우가 퍼부을 때도 있지만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내가 그렇겠다고 해서 그리 된 게 아니다.

 

나는 가끔 투정부리듯 주께 고한다. 내가 그렇게 하기 싫다고 기를 쓰고 도망쳤는데 하나님이 강제로 끌고 오신 것을 인정하시죠? 나의 무능과 변덕과 누구보다 약함을 잘 아시면서도 나를 여기에 두시고 이 사람의 이런 이야기, 저 사람의 저런 이야기에 얽히게 하시는 것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11).” 이 일이 어쩌다 그리 전개된 이야기가 아닌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12).”

 

이제 다시 누구의 글쓰기를 봐줘야 하나, 저의 이야기로 저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해오던 일을 다시 해야 하나? 나는 요즘 은근히 고민한다. 묻고 회피하고 묻고 회피하고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 안에 이미 답을 두고 계시는 것을 알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13).” 나는 늘 자신이 없어 주를 의지한다. 누가 들으면 대단하다 할지 모르지만 나는 죽겠으니까 이렇듯 주 앞에 앉는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고 주를 바란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불안과 염려로. 그러니까 나의 무기란 게 나의 연역함뿐인데 돌아오는 답은 늘 한결같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언제 어디가 누가 무슨 일을 당할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의 사랑으로 그의 충만함을 가지고 산다. 이를 한 번 더 읊조리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하여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20-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