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나는 변덕스럽고 거리감이 들고 자기고집이 강하고 성질머리가 고약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태연한 척 굴다 근심에 빠지고, 누구보다 시름하다 기도하며, 주를 바라고 감사하다 두려워하고, 속상해하다 찬송하고, 슬퍼하다 기뻐한다. 어쩌면 이와 같은 모습은 일관되지 못하고 제멋대로인 것이어서 늘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 앞에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이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보다 어렵다. 가끔씩 먼발치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결같고 온화하며 평안하여 ‘주의 종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가끔 엘리베이터나 어디 복도에서 마주치곤 하는 전에 같은 층 목사 내외가 종종 보면 늘 인상이 좋고 몸가짐이 단정하며 예의바른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목사님은 늘 좋아보이세요! 하는 인사를 건넨다. 과연 그러한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나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나를 들추신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나의 구원은 나에게서 난 게 아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로 얻은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주께 구한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누구라도 웃음 뒤에 슬픔을 하나씩 숨기고 살아가는 법이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그래서 우리 인생을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결국 아내는 나의 의중을 분명히 알았는지, 손위 처남과 처남댁에게 분명히 말하였다고 했다. 마음은 고맙게 받겠으나 넙죽 손을 벌려 덩달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목사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말씀이 아니라 돈을 구하게 되면 그때부터 목사는 볼 거 없다. 수명을 다한 존재가 된다. 이를 덧씌워 하나님의 일을 하네, 그 뜻을 구하네 하는 소릴 해댈 수는 있어도 이미 돈에 기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사람을 좇게 돼 있다. 그런 거보면 하나님은 이상하시다. 나처럼 주저하고, 겁먹고, 지레 쭈뼛거리는 사람을 들어 쓰신다.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싫다는 사람을 불러 세워 사용하신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쟁이에 겁쟁이였고, 이삭은 어릴 때 부친이 죽이려 했던 칼날에 대한 섬뜩한 기억으로 평생을 주눅 들어 살았고, 야곱은 이기적이며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모세는 말재주도 없고 주저하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늘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도망자 신세로 살았다. 특히 예레미야야말로 세 번씩이나 못하겠다고 자기를 부르시는데 거절하였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응답과 명령으로 함께 하실 것을 분명히 하셨다.
감히 저들과 비교하려는 건 아니고, 왜 하필 나 같은 사람을 여기에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인다. 하도 내가 생각해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변변하게 하는 일도 없는데 그런 내게 왜 이 교회를 맡기셨을까? 나야말로 거짓말쟁이에 변덕쟁이에 이기적이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주저하고 망설이기 일쑤인데… 그러다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고백하기를, 솔직히 좋은 기회지! 누가 봐도 횡재다 싶게 저들이 다 밀어주고 도와주겠다는데, 이참에 옳다구나 하고 처가 덕을 좀 보는 게 왜 나쁘겠어? 내 속에는 왜 그런 마음이 없겠어! 그야말로 요즘 어디 신도시 아파트 한 채 분양 받는 게 하늘에 뼐 따기처럼 다들 꿈만 같은 세상에서… 영순위에, 못 이기는 척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을. 그러나…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사명을 되새기다 보면 알 수 있다.
전에 같으면 바라던 것을 이제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느라 드는 삶의 비용이 너무 사는 데 드는 열심이 과하다. 가령 주식에 돈을 넣었으니 눈만 뜨면 장세를 살피는 것은 당연하고, 뭘 하나 얻었으니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도 기를 쓰고 사는 일은 마땅하지 않겠다. 대출을 받아 사업을 했다 하면 그 일에 정신이 팔리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이고 말이다. 돈이 있으면 좋겠는데 돈이 있으면 돈이 있어서 사람이 또 돈다. 순간 이상해져 더는 아쉬울 게 없나 기도도 주를 바람도 찬송도 전 같지 않아지는 것이다. 그뿐인가? 누구의 기대나 존중, 환대나 으쓱하는 우쭐거림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교만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순식간에 나를, 먼지만도 못한 나의 믿음을 빨아들인다. 오히려 나의 주저하고, 겁먹고, 쭈뼛거리는 것을 누구보다 주께 아뢰고 주의 도우심을 바람 살 수 있는 지금이 가장 복된 것이다.
기어이 요나는 도망치다 물고기 밥이 되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삼킨 것을 끌어다 가라 하시는 땅에 토해내게 하신다. 안 믿는 자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이다. 하나님은 나의 허점을 가지고 주의 도우심을 더하신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나는 그리 받는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이 모든 게 은총이 아니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늘 되새기는 말씀이지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아니면 나도 저들처럼 단단히 돈에 홀리고 권력에 홀리고 어떤 권세와 영광에 홀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영혼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성경은 엄연히 약속하고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도대체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러할 수 있었겠나?
가정예배를 드리며 주께 기도하기를 이 땅에 나의 모든 걸 투자하는 어리석은 짓을 범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 57:10).” 도망자 다윗은 그 신세를 한탄하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았다. 하여 저의 찬송은 주께로만 향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 이를 오늘 에베소교회에 설교하는 바울의 시선으로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곧 오늘 나의 이런저런 모습이 빙충맞고 찌질 하고 별 볼 일 없는 위인으로, 특히 가족들 앞에 면이 서지 않는 일이기는 하나 그 이상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어떠한가를 단내 나게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를 살리셨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예전의 나를 돌아보면 끔찍하기만 하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그러니 오늘도 여전한 그와 같은 모습에 어찌 아니 한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나? 살면서 오늘보다 풍성하였던 때는 없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사람들은 다들 사느라 기를 쓰고 생색은 저 혼자 다 내는데… 어제는 교회가 있는 자리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개업을 알리고 축하하며 그 와중에도 누구는 돼지머리를 준비하여 그 앞에 절을 하기도 했던가보다. 부인이 음식을 가져다주며 목사님 기도 많이 해주세요, 저는 절하지 않았어요, 하며 기도해주세요, 하는 말을 여러 번 되뇌다 조용히 나갔다. 주께서 저의 마음을 보시고라도 이 모든 작태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그렇게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3-5).” 말씀이 고스란히 오늘의 나를 진술하고 계시다.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오늘 말씀이 더욱 확실하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가 아니면 내가 무슨 수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이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9).”
그때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주를 바랄 것인지 세상을 좇을 것인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나머지 전부를 포기하는 일과도 같다. 이것도 잡고 저것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목사가 욕먹고 교회가 덕을 잃는다. 사람들도 모으고 돈도 벌고 복음도 전한다?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아지고 어디서나 환영받으면서 주의 종으로 살아간다? 마치 아홉을 선택하고 하나를 마저 이루려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저들은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인정 받는 일에 목숨을 건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우리는 오롯이 주만 바라는 사람들이다. 결국 믿음은 결정이다. 하나의 선택이다. 나머지를 포기하는 일이다. 내어맡김으로 나아가는 바탕이 믿음이다. 이게 아닌가? 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어쭙잖음이 실은 주께 복종을 하게 한다.
척척, 내가 알아서 잘할 것 같으면 굳이 주의 도우심을 바랄 것까지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나도 엄연히 히브리서 11장에 드는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 중에 하나로 산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1-2).” 저들의 달음박질을 따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 나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아, 그러자고 예수께서 죽으셨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이와 같은 말씀이 저기 인천 계양이니, 경기도 남양주니 하남이니 하는 곳에 새로 지어지는 신도시 아파트만 못하겠나? 거기에도 그처럼 목매고 매달리면서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나는 다만 주께 아뢴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든지, 오해를 하든 비난을 하든 오직 주만 바라며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3).” 그리하여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4).” 여기서부터였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5).”
그리하여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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