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시편 88:13, 18
그런 것 같이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주의 이야기를 바로 알지 못한다. 어디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이상하게 뭐라 표현하기 힘든 서러움으로 자기 혼자 억눌린 것 같은 것도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연히 하나님은 우리 인생 이야기에 엄청난 목적을 두고 그것을 기록하셨다.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이러한 사실 앞에 나는 주저하면서도 주의 이야기를 따른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댄 알렌더의 책을 다시 읽게 하셨다. 특히 요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새삼 놀란다. 내가 주저하고 있던 것을 어찌 알았을까? 보니 2011년 7월에 읽었는데 모든 내용이 새삼스러웠다. <약함의 리더십>을 읽고 이어서 망설이던 것에 대하여, 어제는 나름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적어보았다.
- 잠언으로 자기분석 글쓰기
1. 모든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가진다.
2. 우리의 지난 날 이야기는 신발장에 처박아둔 낡고 작아진 신발처럼 처분해야 하는 골칫덩어리가 아니다.
3. 자기 이야기를 탐구/분석하는 일은 ‘왜 사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자신에게 알려주는 일로, 아는 만큼 올바로 나아간다.
4.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는 일은 유익하다.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떤 도움의 손길로 살아왔는지를 알게 하고 이를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선사할 수 있는 선물이 된다.
5. 자기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줘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곧 더불어 사는 사회의 바탕이다.
* 잠언으로의 자기분석 글쓰기는 심리학에서의 상담과 다르다. 먼저는 [잠언]을 토대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렸던 지혜의 왕 솔로몬의 격언이 우리의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준다. 또한 글쓰기를 통한 이야기는 스스로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과 같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 안의 여과장치 역할을 한다. 말은 감정에 의한 진술이라면 글쓰기는 사고에 의한 체계화된 말이다.
이에,
- 자기소개서와 문예창작
상급학교로의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할 때 언제부턴가 정형화된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준비한다. 실제 논술은 수필에 기인하고 수필은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게 좀 더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서술형 글쓰기로 변형되고, 급기야 ‘자소서’라는 자기 피알(Public Relation 선전, 광고, 홍보)의 기형적인 형태로까지 진화하면서 급기야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작품이나 관련 근거 서류를 작품집으로 포트폴리오(portfolio)를 마련하는 게 기본적이 되었다.
이는 결국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진지한 탐구와 성찰에서 가능하다. 이를 풀어서 문학적인 형태로 전개하면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고, 얼마든지 문예창작을 시도하고 지원할 수 있다. 요즘은 다양한 문화를 토대로 하는 글쓰기 시장이 형성되어 문학공모나 예술지에 응모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이때 그 소재는 결국 ‘자기 이야기’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글쓰기의 자료이다.
결론은 자신을 돌아보고 그 이야기를 용감하게 직면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도움을 주며 나아가 우리의 영혼을 밝게 한다. 우리는 절대 어쩌다 우연히 이 땅에 버려진 것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러한 취지로 우리는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기도를 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내용의 사연은 없다. 어느 이야기도 아무렇게나 버려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글쓰기는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에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개개인의 독특하고 놀라운 ‘인생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그러니 댄 알렌더는 목소리 높여 내 인생 이야기를 다 쓰신 분과 씨름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묵상하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이 우리로 근심하신다. 자신을 방치함으로 분내는 것과 분냄으로 주를 더욱 찬송하는 일은 하나에서 두 개의 가지가 나오는 일과 같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이를 오늘 말씀으로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분을 내는 일이 어떤 경우에는 정당하다. 예수님은 성전의 장사치들을 향해 분을 내셨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또한 위선과 아집으로 거짓을 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곧 우리는 분을 낼 때 분을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옳고 그름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남을 자꾸 비판하게 돼 있다. 왜냐하면 우리 눈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는 남만 보이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나를 보려하면 거울을 통해서야 가능한 것처럼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보는 것이다. 성경은 나의 이야기를 쓰신 이가 기록하신 말씀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위시하여 성경의 사람들은 나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예수님은 일러,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하고 말씀하신 것은 나의 열매가 나로 인한 게 아닌 것을 알게 하신다. 열매는 뿌리와 줄기와 나무에 따른 것이다. 시인은 우리를 일러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하였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고로 우리는 열매를 맺게 돼 있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이처럼 아침마다 나로 찾아오시는 것은 주께서 어찌 나로 내가 사랑하는 것을 멀리하게 하시는지를 알게 하신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시 88:13, 18).” 주를 가까이 하기 전에는 이를 알지 못했다. 아니, 싫어하였다. 나와 어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하였다. 곧 세상을 좋아하면 하나님이 싫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세상을 좋아할 수 없다. 이는 당연한 논리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누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추어 볼 때 저의 이런저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이상할 정도로 하나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모두가 다르지 않다. 결국은 돈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는 참 유치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로 좋다가 틀어지는 이유도, 사랑하다 미워하는 것도 실은 이래저래 따져보면 돈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돈에 팔려서인 것을,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는 이유도 실은 그게 돈돈거리며 사는 일에 치이다 보니 그렇다. 그래서 새삼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의 소중함에 대하여, 또한 이를 스스로 글로 쓰는 것에 대하여, 이를 돕고 함께 하는 일에 대하여, 주께서 내게 주시는 마음이 아닐까.
그렇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되새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30).”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변개가 없는 인증을 가지고 사는 이야기다. 내 이야기를 알면 알수록 그 쓰신 목적은 뚜렷해진다. 그러할 때,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2).” 당당히 주께 아뢸 수 있는 것이다. 왜? 이 이야기는 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내 인생은 엄연히 주의 필 끝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8).” 나로 구별하시는 것은 내가 주께 두 손 들게 하려 하심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9).” 이는 결국 주 앞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오늘 바울의 역설처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주는 어떠하든지 선하시다는 것,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시 8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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