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전봉석 2021. 7. 2. 05:42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살전 2: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누구 일로 혀를 쯧쯧, 다시면서 우리는 마치 조금은 나은 듯 어쩌다 저리 되었는지, 하는 식으로 남 이야기 하듯 한다. 그럴 때 ‘외식적인 나’와 ‘진정한 나’는 거리를 보인다. 외식적인 나는 거리를 두며 상대를 비난한다. 뭐라 일컬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진정한 나는 자기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안다. 앎으로 괜히 송구하고 민망하다. 다 내 이야기 같다. 외식하는 나는 의무적인 자세를 취하고 진정한 나는 신실한 마음으로 주를 구한다. 성령으로가 아니면 이해도, 용서도, 수용도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고 자세를 바로 한다.

 

우리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 마음은 절실함으로 무모하다. 재고 따지고 면구스러워하는 일에는 아직 살만한 것이다. 남 이야기 하듯 하는 경우가 대체로 그렇다. 자신은 좀 나은 줄 알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여길 때 더는 진전이 없다.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 믿음은 있으나 행함이 없는 것은 한끝차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사도가 이를 말하는 것은 안다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이를 실천함으로 그 의미를 다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문제를 안다고 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모르는 것보다 고질적이고 완고하다.

 

누구와 같이 글을 쓰기로 했다. 선뜻 그러겠다고 한 것이 의외일 정도였다. 그만큼 영혼의 목마름을 알겠다. 주를 믿고 해보자, 하고 저의 방을 따로 만들어주고 먼저 해야 할 것을 일러주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기도가 중요하고 이를 실행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해야 했다. 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엄청난 고집들이 있다. 서로가 나는 괜찮다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할 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오늘의 이 모든 어려움을 은혜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제를 어김없이 주의 섭리로 받지 않으면 ‘나만 왜 이러지?’ 하는 식으로 접근하기 쉽다. 이는 거꾸로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고 스스로의 문제를 축소하거나 은폐 왜곡한다. 그럴 때 더는 회개도 화해도 없다. 하나님이 그것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본질적인 의도도 희석된다. 그러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하여 ‘~때문에’와 ‘~였다’는 단정적인 회피가 나타나게 된다. 곧 말씀에서처럼 나의 약함을 인정할 때 은혜로 이를 받아야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아니면 전혀 엉뚱한 열심, 나름의 충성으로 변질되어 ‘사울 왕의 경건함’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느닷없이 금식을 선포하고, 전쟁에 앞서 서둘러 자신이 예배를 치르려고 하는 형식적인 접근으로 죽은 사무엘까지 끌어올려 필요에 따른 경건을 도모하는 것이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는 자기 오해가 외식적인 자아를 알지 못하게 한다.

 

내가 뭘? 난 그래도… 하는, 자신 나름의 판단이 성경의 외침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시는 말씀을 도전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 안주하려는 마음에서 듣고 거짓 평안을 추구한다. 일련의 이런저런 일, 누구의 이야기는 결코 저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나의 이야기는 엄연히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타내심이다. 이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읽지 못하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헛되이 봉한다.’ 마치 예수를 무덤에 헛되이 봉하던 사람들처럼 스스로의 이야기를 무덤에 봉하듯 아무도 모를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 말씀은 이에 그 의미가 내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님을,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하여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20).” 누구의 일로 씨름하고 저의 아픔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나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을 안다.

 

전 주에 내과적인 검사를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 어려워서 이를 정신과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실제 너무 힘들어서 말이다. 어제는 엑스레이니 심전도 검사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피를 뽑아 예닐곱 가지 검사를 했던 것이다. 의사는 이것도 정상, 저것도 정상하면서 화면에 띄운 그래프와 여러 수치들을 확인하면서 다 정상인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 소화기 쪽의 문제로 돌려 엄청난 양의 위장약과 혹시 모르니 진경제 등을 처방하며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마음 편히 드세요.’ 하는 말이 전부였다. 그러니 늘 같은 소리라, 나는 얼떨결에 한보따리가 넘는 약을 타들고 집에도 전에 받아온 그만치의 것을 생각하며 한숨을 졌다. 내가 하려 하는 것의 결과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달하고 괜히 속 끓이면서 마음 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니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 길을 제시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그래도 감사한 것은 선뜻 같이 하겠다고 나서서 멋모르고 서로 시작하는 일이다. 덥석 그리 된 일을 두고 염려가 먼저 앞서기는 하지만 그래서 주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주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엎드린다. 한 주에 한 번 오기로 하고, 그때마다 편히 글을 쓰기로 하면서, 글로 풀어가는 저의 이야기가 저로 치유가 그 상처를 주께 내어 보이는 시간이 되기를. 나는 결코 의사가 아니다. 병든 자다. 의사가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환자다. 환자로 환자를 마주하는 일이다. 같이 우리의 의사되시는 주 앞에 내어놓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하여 내가 안다고, 본다고 여기는 그 자체로 거역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나는 결코 누구보다 낫지 않다. 그 정도는 아닌 게 아니라 더하다. 나의 문제로 그의 문제를 보고 그의 문제로 나의 문제를 주께 아뢴다. 주가 다루시기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