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시편 98:4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친정 아빠여도 이혼하라 했을 것 같다. 듣다보면 마음이 안 됐고 속상한데, 싫든 좋든 오늘의 일은 언제의 결과다. 그렇게 선택한 일이고 그 일에 따른 것이다. 오늘의 일로 내일을 마주해야 한다. 과거를 딛고 현실을 살고 미래로 나아간다. 누구라도 방도가 없다. 예전의 내가 후회된다고 해서 오늘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는 저에게 무엇 때문이고, 누구 탓이고, 누가 어떻고 하는 따위에는 답이 없다고 일렀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내가 마치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누구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줄 알지만, 그래서? 차마 모진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얼마 전의 이야기나 몇 년 전의 이야기나 오늘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았다. 늘 같은 문제로 또한 씨름하고 괴로워하고 뭐라 이르면 돌아가서 다시 또 그러고 사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얼마쯤 지나서 만났을 때도 오늘의 이야기처럼 전에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푸념을 늘어놓을 것이다. 어쩌면 더 강도가 세진 상황으로 괴로워하면서 말이다.
이에 오늘의 말씀을 먼저 음미한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막연히 아뢰어 넋두리를 일삼는 게 기도가 아니다. 깨어나야 한다. 그 증거는 감사다. 그런데 상황은 악화되고 서로의 골은 깊어만 가고 그러면서도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 여기며 다시 또 산다. 사는 게 지옥이다. 그런 가운데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시 98:4).” 하는 말씀이 와 닿기나 할까? 듣다보면 내가 다 속이 터질 것 같다. 명치끝이 꽉 막히는 것 같은 답답증으로 가슴을 쓸어가며 저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 뭐라 해야 할까? 귀로는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으로는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할 말이 없었고, 아니 늘 같은 처지의 이야기로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듯하여 속상하였다. 나는 꼭 친정 식구가 된 것처럼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였다. 점점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할 텐데? 나는 모질게 말을 하였다.
저절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는 없다. 성령의 바람은 때로 가혹할 정도로 세차고 모질다. 그러는 동안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자신으로 주 앞에 내어지지 않으면 그 길이 참 멀다. 물론 모든 인생은 고유의 이야기를 지닌다. 실은 그 어떤 주변 이야기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 이야기로 복음을 위해 쓰임받길 바라야 한다.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이야기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어쨌든 나의 이야기이겠으나 담대하게 살아드리는 것이 수동적으로 끌려가듯 사는 것보다 아름답다. 이미 나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런 나를 살리신 목적이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그런대로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은 허사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 1:21).”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인지.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르셨다. 하나만 해라.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 그러니 저의 일을 두고 남편 목사의 채근과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대하여 나는 뭐라 할 게 없었다. 저쪽은 이쪽을 이쪽은 저쪽을 탓한다. 그 사이에서 아이만 눈에 띄게 야위어 간다. 어쩌면 지금의 심경이 저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고, 주를 더욱 바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나의 고질적인 권함은 자기 이야기를 쓰라는 거였다. 자식도 신랑도 아닌 자기 이야기에서 주의 뜻을 살펴야 한다. 늘 듣다보면 정작 자기는 없다. 한데 실은 온통 자기뿐이다. 이와 같은 모순의 악순환을 어쩌면 좋을까?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는 상처를 주고 가슴을 후벼 파는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그 내용을 읽다 머리를 한 대 쥐어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지 않는다면 그런 이야기를 왜 읽겠나?’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중에서.
문득 전에 읽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아마존 유역의 간척지로 이주한 초대 이주민이었다. 일찍 아내를 여의고 홀로 늙어가는 노인이 되어서도 저는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는 화물선 선장에게 부탁하여 ‘억장이 무너지는 연애소설’을 구해달라고 해서 읽는다. 앞서 카프카의 말과 같은 의미로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지만 그 이야기 밖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누구도 앞서 다음 장의 이야기를 알 수 없다. 그러려면 작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그때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다. 뒤통수를 한 대 쥐어 맞은 것 같은 이야기다. 심지어 남의 이야기에서도 그런 동기부여가 오늘을 사는 용기를 더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이야기에서야 어찌 충격이 없는 것일까?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그 내용이 전에 것과 다르지 않고, 그때 들었던 이야기에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면… 카프카의 말처럼 ‘정신이 번쩍 들지 않는다면 그런 이야기를 도대체 왜 읽고 있나?’ 하고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을 살면서,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남들 사는 일과 다를 게 없이 전전긍긍 칭얼거림으로 배알이 꼴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러고 있느라 정작 우리의 원저자인 하나님이 나의 이야기에서 무얼 말하려고 하시는지 관심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아뿔싸! 우리의 이 심각한 영적 난독증이여. 도무지 읽고 있으면서도 무슨 내용인지를 모르겠으니 이 일이 어찌 된 일인가? 실제 저는 잠깐 건넨 책을 돌려주며 요즘은 한 문장을 다 읽고 이해할 수가 없다고 토로하였다. 나는 저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상해있는지 짐작하다 마음이 아팠다. 더욱이 목사와 사모로 맺어진 부부 사이면서 전도사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귀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데….
나는 저의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를 해! 하고 다그쳤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골 4:5).” 언제까지 자식 일로 신랑 일로 전전긍긍 자신의 이야기는 등한히 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낼 것인가? ‘세월을 아끼라’ 하시는 말씀이 가슴을 울린다.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따위의 말에 속으면 안 된다.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어제의 내가 결정한 게 오늘이라면 오늘에 나는 내일을 결정해야 한다. 어쨌든 우린 과거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그와 같은 지난 날로 인해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그 과거를 쓰셨고 오늘을 쓰셨고 내일을 쓰셨다. 오늘과 내일의 나의 이야기를 쓰셨지만 그 이야기에서 우리로 능동적인 참여를 기대하신다. 어쩌다 마지못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레네 시몬으로 족할 문제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에 내가 참여하고자, 안 믿는 작가들의 눈에도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것처럼’ 충격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왜 읽고 있나? 하는 소릴 듣는데 하물며 성경을 알고 말씀을 가지고 산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에게 성경 말씀이 나의 뒤통수를 한 대 치는 경험도 없다면!
그저 끌려가 살았다면, 사는 것으로 전전긍긍하여 궁여지책으로 살았다면, 요셉이 과연 요셉으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을까? 그저 노예로 또는 억울하게 갇혀 옥살이를 하다 영웅적인 애굽의 총리로 살다 죽은 위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와 같은 능동적인 참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저는 자신의 모든 처지를 하나님께 돌릴 줄 알았다. 그래서 노예로 살든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든지 주를 경외함을 잃지 않았다. 곧 자신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는 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오늘의 이야기로 함몰되면 볼 수 없다. 아이라는 작은 나무 하나에 코를 박고 호호거리며 그것만 유심히 살펴서는 전체 숲을 볼 수 없다. 신랑 목사의 이질적인 모습으로 환멸을 느끼며 그 한 사람에게 전념하느라 정작 자신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요셉이 그저 노예로 팔려갔던 억울함으로 얽매였다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원통함으로 사로잡혔더라면 저의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한정되어 더는 확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의 나의 이야기가 그렇게 꽁트 수준의 어느 한 꼭지 짤막한 이야기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러려고 쓰신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나의 이야기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라는 것이 주의 영광이 된다.
아이의 그런저런 상황에 나도 어땠냐 하면, 하고 말을 하자 대뜸 그 시절과 오늘은 다르죠! 하고 말하는 저의 끔찍한 오해 앞에 오늘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없다. 저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는 데 따른 추구하는 바가 훨씬 세련되어져서 시대가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타이타닉 호는 침몰하였고 뒤이어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까지 연이어 터졌다. 그때도 저들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였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서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다고 착각하였다. 그렇게 9.11 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오늘은 과연 어떠한가? 어느 기사에서 보니 엄마, 아빠, 아들, 딸 온 가족이 성전환수술을 하였다는 보도를 보았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월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좀 살림살이는 나아지셨는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지. 잘 다루는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코인을 발굴하고 미성년아동들의 음란물을 돌려보고 히죽거리는 시대가 좀 나아진 것인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지상의 집 한 칸을 마련하겠다는 게 이 시대의 꿈이 되었다.
나는 저가 돌아가고 속상하고 속상하여 괜히 다 울렁거렸다. 자신을 쓰라고 권하였다. 기도밖에는 달리 답이 없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 그러니 목사고 전도사인데 기도나 말씀 정도는 누구보다 수월하고 월등하지 않겠나? 부디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하면 우리의 이야기는 맛을 더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6).”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을 두신다. 나의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신다. 나는 요즘 이 명제에 매료되었다. 하나님께는 나뿐이다. 내 이야기가 전부다. 이는 역으로 나에게 오늘의 이야기는 하나님으로 전부다. 저가 쓰신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전하여지기를 바란다. 나는 누구의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에서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전하여지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친정식구처럼 저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이혼을 권하고 자식이고 뭐고 저 하나 제대로 건사하고 살라고 호통을 치고 싶은 심정이나… 그렇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더는 무엇을 말하겠나?
부디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 98:1).” 우리의 새 노래란 무엇일까? 같은 환경인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이 지긋지긋한 현실인데,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2).” 이를 읽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새 노래로 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업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4).” 그러하기를. 부디 그러하여서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8).” 우리의 남은 사역이었다. 곧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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